문화/생활
1980년대 중반 가을 끝자락, 차에서 밤을 지새우며 맞이한 경기도 양수리의 새벽.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가에 어부가 마치 나를 위해 기다린 듯 노를 저으며 홀연히 나타났다. 어부는 전날 쳐놓았던 그물을 건져 올리려고 ‘깊은’ 새벽에 몸을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나 또한 새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그랬다. 그는 강 한가운데서, 나는 이쪽 강가에서 각자의 ‘목표’를 위해 새벽 공기에 몸을 던져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새벽 풍경은 사진의 ‘대상’이 아니었다. 풍경사진이라 하면 으레 멋진 동해 일출(日出)이나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 등 관광 명승지를 찍는 게 일반적이었다. 유럽의 풍경사진을 보며 그곳을 동경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랬듯, 어릴 때 나 또한 그랬다. 당시 젊은 사진가였던 필자의 눈에는 기성 작가들의 풍경사진이 진부하게만 느껴졌다.
그 무렵 ‘우리나라다운 풍경은 과연 뭘까’라는 생각에 전국을 누볐다. 순간 머리를 스쳐간 것이 바로 ‘새벽 풍경’이었다. 새벽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정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리라. 물론 구한말 서양인들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우리나라를 표현한 것을 굳이 예로 들고 싶지는 않다. ‘고요한 아침’이라는 게 ‘정열’과 ‘힘’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새벽이야말로 새로운 출발이며, 희망을 향한 힘찬 발걸음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어둠이 짙게 깔려도 새벽이면 여명이 찾아오고 해가 뜬다. 한파가 몰아치는 동지섣달이 아무리 길더라도 어김없이 봄은 온다.
새벽은 희망과 출발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우리의 일상적인 시골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름 모를 작은 어촌과 시골 마을, 산골짜기 오솔길과 눈 덮인 들판의 새벽 모습을 카메라에 고이 간직해왔다.
새벽을 찍는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며칠 여행길에 마음에 드는 사진을 단 한 컷도 못 찍을 때가 더 많았다. 풍경과 사람이 서로 어울리는 장면을 담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지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풍경의 결정적인 순간을 만날 때까지 춥고 더운 벌판에서 홀로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면 또 하루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우리나라 새벽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번 작품전을 열었다. 사진계에서는 나를 두고 ‘풍경사진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라고 평하기도 했다. 국내외 저명한 상도 몇 차례 받았다. 그렇다고 지나간 영광에 안주할 수는 없다. 흘러간 시간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욱 가치 있고, 도전할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유년 봄을 앞두고 있다.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면 지체 없이 시작해야 한다.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새벽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맞이하는 것처럼. 부지런해서 새벽을 찍는 게 아니라 새벽을 찍기 위해 부지런할 뿐인 것처럼.
박상훈 |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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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