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번역가의 생활을 구획 짓는 단위는 ‘마감’이다. 오선지에 그려진 가느다란 세로줄인 ‘마디’가 멜로디를 열고 닫듯이, 마감은 번역가의 삶을 바짝 조였다가 느슨하게 풀어놓았다가 하며 거기에 리듬과 질서를 부여한다. 리듬과 질서라니, 이런 점잖은 말을 늘어놓을 수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은 거다. 몇 가지 우연이 극악하게 결합해 리듬이 꼬여버리면 후배 결혼이니 가족 모임이니 할 것 없이 “세상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소리를 들으며 불참을 알려야 한다. 일과성 운동도 폐하고, 읽지 않은 신문은 일수 이자로 불어나며, 머리를 깎으러 동네 미용실에 가는 일마저 나중으로 미뤄진다. 부끄러운 얘기다.
올해 초 일이다. 돌발 변수가 한두 군데도 아니고, 네댓 군데에서 돌출하니 작업이 암초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 못했다. 출판사 쪽에 이미 ‘마감일 유예 찬스(?)’를 사용한 마당이라 재차 부탁하기도 민망해 속이 숯검댕이가 돼갔다. 생각다 못해 같은 일을 하는 동료 번역가에게 묘수를 묻기에 이르렀다.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사정한다? 그건 자기 마음 편하자고 하는 거지. 듣는 사람 입장에선 짜증만 난다고. 그냥 상대도 감정적인 저항 없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줘. 지금은 그게 자비야. 데이터가 통째로 날아갔다든지 갑자기 아파서 몸져누웠다든지, 그런 거 있잖아.”
그러면서 내게 일러준 비급은 이랬다. 담당 편집자에게 메일을 보낸다. 내용은 이런 식이다. 드디어 마감을 끝내서 홀가분하다. 나는 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제 먼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 그러고는 메일 보내기 클릭. 여기서 포인트는 자정과 새벽 사이에 메일을 보내되, 파일을 첨부하지 않은 채로 전송한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이 작전의 얄팍한 꼼수를 눈치 챘을 것이다. 요컨대 ‘이런, 파일 첨부가 안 됐네요’ 작전이다. 업무 시간이 되어 메일을 열어본 담당자가 득달같이 연락하면, 그제야 가련한 희생자의 포즈를 취하며 이렇게 말하는 거다. “여행 중이지만 할 수 없죠. 여기서라도 다시 작업해서 보내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동업자, 아내의 반응은 싸늘했다.
“풋, 그렇게 해서 마감 연장을 받으시겠다? 근데 과연 와 닿는 거짓말일까? 그 친구 말에서 맞는 건 상대도 감정적인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까지야.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에서는 문제가 있네.”
구체적인 방법론이라니, 베테랑 같지 않나. 그도 그럴 게 아내는 대학생 때부터 방송작가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윤문, 번역, 칼럼 연재 등등 소소한 마감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자기 말로는 결혼 전까지 마감에 쫓겨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노트북에 노상 고개를 파묻고 자며, 밥도 싱크대 앞에 서서 먹는 식이었다고 한다. 결혼 후 그 버릇을 고친 계기도 별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살지 않기로 한 거다. 이 마감이 끝나면 저 마감이 오는데, 마감에 치여서 인생을 계속 미룰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나. 아내는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아무리 극악한 상황에서도 데이터를 날렸다거나 아프다는 거짓말만큼은 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알아? 첫째는 거짓말로 들리기 너무 쉽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이유를 거짓말에 써먹으면 나중에 정말 그런 일이 생겼을 때 대책이 없어지기 때문이야.”
아내는 차라리 엄마를 걸라고 조언했다. 어머니가 아파서 보호자 노릇을 하느라 차질이 생겼다고. 그것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라는 내 의구심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맞아. 의심을 아주 피해갈 순 없지. 왜냐면 상황이 이미 의심스럽거든. 하지만 동시에 이런 마음도 드는 게 사람이야. 어머니가 아프다는데 설령 의심스러워도 믿어줄 수밖에 없군.”
아내의 설명은 거짓말에 대한 일본 고사로까지 확장됐다. 한 마을에서 늑대 소탕 작전이 펼쳐졌다. 주민들은 한 소년이 새끼 늑대를 보호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집을 찾아간다. 옷 속에 새끼 늑대를 감추고 있는 게 빤한데도 소년은 극구 부인한다. 그 와중에 야성이 깨어난 새끼 늑대는 소년을 물어뜯기 시작하고,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소년은 피 흘리며 숨을 거둔다. 주민들은 소년의 장례를 정중히 치러주고, 거짓말에 대해서는 침묵하기로 한다. 왜냐면 소년이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이런 각오로 하는 거라고, 우리는 이제부터 우리가 한 거짓말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고 아내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그제야 겁이 덜컥 났다. 아아, 거짓말의 도(道)는 멀다. 나는 초현실적인 수치심을 이기고 편집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 사정으로 마감을 그만 못 지키게 되었습니다….”
구승준 | 번역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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