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추억 때문에 버릴 수 없다고? 추억이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해줄까? 지금보다 더 많이? 흔히 물건에도 영혼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추억이 깃든 물건은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집착 때문에 미래를 방해하거나 현재를 정체시켜야 할까?”
도미니크 로로의 책 <심플하게 산다>에서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심히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격언 같은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는 공간을 채우느라 공간을 잃는다.
일본의 교토에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친구의 집 다실이었다. 다실 안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텅 빔’ 때문에 방 안은 햇빛이 디자인한 다양한 무늬들을 가득 품고 있었다. 부드러운 햇살이 움직일 때마다, 그 무늬들은 벽과 바닥을 산보하듯 명랑하게 활보했다. 마치 햇빛이 마구 찍어놓은 시간의 발자국들처럼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텅 빔’의 격조를 느꼈다. 고급 가구들로 장식된 방이 아니라, 햇빛과 바람과 나무 그림자로 채워진 방의 아름다움을 말이다.
이사를 자주 하면 알게 되는 게 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언제나 물건이 많다는 것. 이사 당일, 황급히 트럭 한 대를 더 부르는 해프닝은 그렇게 일어난다. 이사를 할 때마다 나는 결심했었다. 이번에야말로 미니멀리스트로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마침내 2002년 미니멀리스트란 단어를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내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발견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 읽었던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을 시작으로, 나는 <청소의 여왕>이나 <정리의 발견> 같은 책들을 읽었다. 특히 일본인 정리 컨설턴트가 쓴 <정리의 발견>이 인상적이었다. 몇 년 후 <심플하게 산다>나 <작은 집을 예찬한다> 같은 책들도 읽었다. ‘미니멀 라이프’란 제목이 들어간 책들 중에는 일본인이 쓴 게 많았고, 그것이 동아시아 대지진 이후 언제든 버리고 떠나야 하는 삶을 직접 체험한 일본인들 마음에 새겨진 트라우마 때문이란 걸 알게 됐다.
애플로 복귀한 후, 스티브 잡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낡은 서류와 오래된 장비를 모두 없애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언제나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까를 먼저 생각했고, 그것이 버튼까지 없앤 ‘아이폰’의 탄생을 불러 왔다. 알다시피 잡스는 늘 같은 옷과 신발을 신었는데, 그것 역시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미니멀리스트로 사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적게 가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가령 좋은 옷을 사서 오래 입겠다는 것, 좋은 음식을 천천히 씹어 소식하겠다는 소비 행위 이외에 무의미한 일에 쏟는 에너지를 줄이겠다는 결심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인생철학인 것이다.
고백하면, 나는 매해 금연을 선언한 사람처럼 미니멀리스트 되기에 여러 번 실패했다. 하지만 올해 많은 물건들을 기부하거나 버렸고, 몇 년째 ‘거의’ 쇼핑을 하지 않고 있다. 십수 년 실패의 연대기 속에서 얻게 된 깨달음도 있다. 벼락처럼 찾아오는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극적으로 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나 소설을 읽고, IT기업의 벼락같은 성공신화를 보며 자란 탓에 변화나 혁신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다. 변화란 드라마틱하게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변화는 쏟아지는 빗속이 아닌 안개 속을 걷는 일과 비슷하다. 희뿌연 안개 속을 헤매다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젖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변화’에 대한 가장 감각적인 설명이라고 믿는다.
새해다. 누가 뭐래도 ‘작심삼일’ 같은 말이 나는 좋다. 작심삼일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3일에 한 번 ‘작심’한다면 3일이 300일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내게 미니멀리스트 되기는 아직 진행형이다. 하지만 덜어낼수록 가벼워진다는 진실만큼은 확실히 알아가고 있다. 부자에 대한 나름의 정의 또한 바뀌었다.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다. 필요한 것이 더 이상 없는 사람인 것이다.
백영옥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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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