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갈등의 날들이었다. 몸속에 이렇게 많은 씨를 품고 산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었다. 베란다를 드나들 때면 일부러 눈을 돌렸다. 어쩌자고 일을 만들었을까. 창을 통해 들어온 온순한 햇살은 뜨겁게 달궈진 기름처럼 내 갈등을 지글지글 부추겼다. 버릴까 말까. 햇살은 춘분을 넘어서자 더욱 제 역할에 힘을 주었다. 열흘쯤 지났을까.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했던 수분 증발이 말끔히 사라졌다. 더는 그냥 둘 수 없어 거둬들였다.
그러니까 이 작은 사태는 엄마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마흔 초반에 남편을 여의고 뚝심과 강단으로 살아온 엄마다.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으며 아홉이나 되는 자식들의 생일을 빠짐없이 챙길 정도로 총기도 밝다. 명절엔 두 며느리에게 줄 선물을 잊지 않았고, 대학에 진학하는 손주들에겐 등록금에 보태라며 쌈짓돈을 쥐어준다. 적당히 유머도 갖추고 있어 가족 모두에게 두루두루 인기가 많다.
그런 엄마가 작년 가을 크게 다쳤다. 가을걷이를 할 때였다. 담장 아래로 대롱거리는 호박을 따다가 중심을 잃고 추락했다. 잠시 정신을 잃었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엄마는 가을걷이를 하면 무엇이든 가족 가구 수대로 나눈다. 당신 것과 아홉 자식들 몫을 열 개 봉지에 꽁꽁 싸매놓는다. 가져가기 편하게 고구마·감자·콩·팥 등은 검정 비닐봉지에, 깨 기름은 소주병에 담아놓는다. 해마다 양이 줄어들어서 받을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될까 겁이 났다. 그랬는데 당신 입으로 마지막이란다.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도록 닦은 늙은 호박을 내주며 기운이 없어서 더는 못 하겠단다. 하마터면 호박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 호박을 얼마 전 손질했다. 속을 갈라보니 고르게 크고 잘 여문 호박씨들이 빼곡했다. 여느 때처럼 그대로 씨를 버렸다면 갈등은 없었을 텐데, 마지막 호박이라고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다. 뒷일은 생각지도 못한 채 신문지에 가지런히 널어 말렸다. 대충 눈대중으로 세어 봐도 수백 개였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씨들도 알았는지 쭉정이가 거의 없었다. 몇 개 까서 씹어보니 고소하기가 잣 못지않았다. 매끈하고 단단한 껍질 속 초록씨앗은 신선하고 풋풋해서 마치 봄을 먹는 기분이었다. 멸치 볶을 때 함께 넣으려고 본격적으로 껍질 까기에 돌입했다.
“이 정도면 얼마어치나 돼?”
“글쎄, 한 삼사천 원?”
“이런, 그럼 그냥 사 먹지. 어이구 삭신이야…….”
잠시 도와주던 남편은 슬쩍 등을 돌렸다. 겨우 열 몇 개를 까주고는 과장되게 팔다리를 휘저으며 왜 사서 고생이냐고 툴툴댔다. 언젠가 1000pcs 퍼즐을 맞출 때와 같이 호기심에 달려들던 애들도 진즉에 줄행랑이다. 실은 나도 지친 상태다. 윗니와 아랫니로 일일이 깨물어 까다보니 어느 순간 입술은 호박씨 모양이 되었고, 목과 허리는 우두둑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깨무는 힘이 툭하면 한쪽으로 쏠려 으깨져버리기 일쑤였다.
삶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인내심과 선택을 곳곳에서 요구하는지 새삼스러웠다. 참아야지 참아야 해, 많이도 다짐하며 살지만 막상 참아야 할 순간에 직면하면 그런 다짐은 또 다른 선택을 요구받는다. 인내가 생각보다 가볍다는 걸 알았는데, 그건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올 때였다. 꽃나무들이 빨리 나오라고 불러댔다. 작년보다 더 화사하게 돌아온 자신들을 봐달라고 보챘다.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 혼자 질문하고 답하며 인내해야 할 당위성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당위성은 이미 분명했다. 굳이 찾을 필요도 없게 말이다. 신문지에 쌌다 풀었다 반복할 때마다 호박씨들은 엄마의 ‘마지막이다’를 상기시키듯 찰찰 소리를 냈다. 엄마의 인내가 거기에 다 있었다. 2남 7녀를 키우는 동안 쭉정이가 되는 자식이 있을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고통의 세월을 감내하느라 당신은 늙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꼭꼭 품어준 덕분에 다들 쭉정이 신세는 면했다. 엄마는 끝까지 호박을 놓지 않았다. 높이 3미터 담장에서 추락할 때도. 자식들에게 온전한 호박을 주기 위해서였으리라. 자식들로 하여금 호박에 들어 있는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으리라. 바라건대 마지막인 듯 열심히 살라, 는 당부를 하고 싶어서였으리라.
김순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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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