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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오카리나 할머니의 단풍 든 마음

우리 동네 구멍가게 할머니가 오카리나를 불기 시작했다. 이사 와서 처음으로 가게에서 두부와 콩나물을 사던 날 막 시집을 와서 수줍어하던 그 집 며느님은 이제 아이를 셋이나 둔 중년 부인이 되었고, 주인아저씨는 할아버지가 됐다.

지난 세월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의 무심함을 가늠한다. 하여간 세월은 말이 없다. 아마 그들의 눈에도 내가 많이 변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방송통신대학 국문과에 다니면서 한국 시인들의 시 작품을 통해 나의 존재를 알았고, 그때부터 가게에서 조금은 각별한 대접을 해주었다.

과자나 라면을 사고 계산을 할 때 100원 단위의 우수리는 퉁쳐서 안 받기도 하고, 간혹 지갑을 집에 놓고 와 외상을 해도 아무 때나 달라고 하면서 칠판에 따로 적지 않았다. 예쁜 아줌마 5300원, 쌍둥이 엄마 8000원 등등 계산대 위에 있는 월간 일정표 겸 칠판은 일종의 외상 장부다. 거기에 단골손님 거래 상황을 매직펜으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동네 사람들의 정이 깊어진다.

할머니는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고 오카리나를 인터넷 강의로 배우고 있었다. 필자도 오카리나에 관심이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할머니는 인터넷 동영상을 보며 내가 가게에 갈 때마다 연습을 했다. 거의 매일 소소한 물건을 사기 위해 지나치는 정거장이기도 한 가게에서 언제부터인가 오카리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주인이 있다는 신호이자 물건을 사러 오는 동네 사람들의 무미건조한 발걸음을 경쾌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조금이라도 싼 물건을 구입하려고 땡처리를 하는 교외 창고를 돌아다녔고, 배추나 무, 파나 양파를 다듬어 가지런하게 가격표를 붙여놓는다. 두 분이 곱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나 내 곁에 다소곳이 있는 아내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요즘 할머니의 오카리나 실력은 대단하다. 간혹 스마트폰으로 배경음악을 틀어놓고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도 가게 입구에서부터 오카리나 소리가 들려온다. 할머니는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오카리나를 불고 있었다. 물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때서야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고 연주를 멈추었다. "그냥 계속하시라, 듣기 좋다"고 하니 "아이고, 이를 어째" 하면서 하하 웃으신다.

누구에게나 음악은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처럼 반갑다. 그것이 세계적인 연주가 아니더라도 생활에 지친 건조한 소시민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한다면 지휘자 사이먼 래틀의 오케스트라보다도 만족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십수 년간 거의 매일 보았던 할머니에게서 느끼는 친숙한 마음의 정체를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숨이 막히게 아름다운 색이 오른 단풍이었다. 나뭇잎은 온몸에 물이 빠지면 아름다운 색을 보여주는 노을과 같다. 세월은 단풍 떨어진 자리의 떨켜와 같은 것이다. 그런 단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가끔 즐기는 비틀스의 노래 '헬로 굿바이(Hello Goodbye)'를 크게 틀어놓았다. 단풍은 이제 우리들에게 자신과 헤어질 시간이라고 인사한다. 하지만 나는 단풍에게 인사하면서 그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린다. 작별을 고하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비틀스의 가사 한 줄이 이제 늙어 떨어지는 단풍을 바라보는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 안녕, 나는 안녕이라고 말하는데 왜 당신은 작별 인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hello, hello, I don't know why you say goodbye I say hello).'

 

오카리나▷사진출처:픽사베이

 

· 원재훈(시인) 201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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