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토요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는 한산했다. 독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한 출판사의 배려로 작은 강연을 마쳤다. 나는 강연에 참석한 분들에게 용감한 분들이라고 너스레를 떨곤, 오랜만에 골방에서 벗어나 대형서점을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있었는데 조금은 고독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자 여기에 왔을까 싶었다. 그것은 책이었다.

1

▷원재훈 시인,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서점은 복잡한 도시의 속성을 다 지니고 있는 작은 도시처럼 보였다. 서가에는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지적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었고,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음과 양의 조화로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었다. 문학, 예술, 자연과학, 잡지와 신문까지. 내가 그곳에 서 있을 때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역사와 문화가 내 눈앞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천국이 아닐까. 이 도시를 움직이는 정신의 발전소가 아닌가 싶었다. 대도시의 에너지는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서점은 책을 살 수 있는 도서관이며, 책을 열람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거룩한 장소이다. 한 권의 책을 산다는 것은 가격 대비 성능, 이른바 가성비가 우수한 투자이기도 하다. 고대 동서양의 책에서부터 첨단 기술 이론과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는 매뉴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시작과 끝, 세속과 천상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만약에 책이 없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일 것이다.

일본 영화 <도서관 전쟁>에서 “책을 불태우는 나라는 사람도 불태운다”는 말이 나온다. 이른바 국민정서에 불온한 서적들을 제거하는 세력과 도서관을 사수하려는 도서 사수대의 전쟁을 통해 영화는 시종일관 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는 문화 수준을 부러워하면서, 결국은 인간의 사랑으로 마무리되는 <도서관 전쟁>은 오랜만에 책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 했다.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에서 시원을 찾아볼 수 있는 도서 탄압의 역사는 바로 파시즘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간은 책을 만들고, 책은 인간을 만든다는 유명한 잠언은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인간도 한 권의 책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어떤 책인가. 한 시절 유럽의 상류사회를 풍미한 풍운아 카사노바는 책에 대해 여성을 유혹할 때처럼 화려한 수사를 아끼지 않는다.

“사실 여자란 좋든 나쁘든 처음에는 겉표지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책과 마찬가지다. 첫 부분이 재미없으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 못하며,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느끼는 흥미와 정비례한다. 여자의 겉표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책의 그것과 똑같고,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위인 여자의 발은 책의 판본과 마찬가지의 흥미를 준다.”

카사노바다운 발언이다. 이 문장에서 여자를 ‘인간’으로 바꾸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사람들과 어울려 서점을 산책하면서 나는 숨어 있는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그 책은 정말 아름다운 책이었다. 내 눈에 그 책은 아름다운 여자였고, 강한 남자였다. 사실 “삶은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 때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말은 책 속에서 발견한 것이었고, 그 숨어 있는 책 한 권이 나에게는 더없이 아름다운 삶이었다. 도서관이나 서점의 책들은 그냥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을 우리 손으로 펼쳐야 한다. 그 책들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글 · 원재훈 (시인) 2015.6.22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