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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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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관령 중턱은 벌써 가을걷이가 끝났습니다. 올해 우리 집 밭농사는 풍년이 아니지만 그래도 먹을 만큼은 헐렁한 자루에 담겼습니다. 깻대와 콩대궁은 다시 가져가 밭을 덮어놓았습니다. 겨울 동안 밭의 식량이지요.

햇볕과 습기에 의해 발효되고 바람결에 부서지며 자연스럽게 흙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나뭇잎도 쓸어 모아 닭똥, 소똥과 대충 섞어두면 훌륭한 거름이 되니까요. 산골살림이란 나뭇잎 한 장도 함부로 버리는 게 없습니다.

우리 마을엔 아예 음식물 쓰레기통이라는 게 없습니다. 평소 검소한 소량의 식생활습관 때문이지요. 시골 사람이 이따금 도시에 가보면 참 신기한 것이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골목마다 넘치는 음식물 쓰레기통입니다.

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음식물 쓰레기 옆 게시판에 조그만 포스터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굶주리는 다른 나라 어린이를 돕자는 포스터였지요. 그 앞을 뱃살을 빼야 한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하는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도심 한복판에서 생각의 길을 잃은 듯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우리 산골 마을엔 뚱뚱한 사람이 없습니다. 풍경 또한 그렇습니다. 열매를 흔쾌히 다 떨어낸 앙상한 밤나무가 그렇고 호두나무가 그렇습니다. 요즘은 붉은 홍시가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혼자 마을에서 가장 부자인 것 같습니다. 그 감나무 아래 나지막한 함석집, 마루에 앉아 늦가을 햇살을 받으며 우리 집 영감님이 뜨개질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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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농사나 짓던 쇠스랑 같은 손으로 뜨개질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습니다. 반쯤 뜬 털모자가 삐뚤삐뚤 엉망진창입니다. 딸아이가 해마다 예쁘게 떠서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신생아 살리기 캠페인 모자입니다.

늘 관심 있게 들여다보더니, 지난번 서울 다녀오실 때 버스터미널에서 기부천사가 되기로 약속하고 털실과 바늘을 들고 온 것입니다. 마을에서도 가장 가난한 우리 영감님이 노령연금 9만원을 타서 매월 2만원씩 기부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던데….

저렇게 양지바른 마루에 깡마른 할아버지가 앉아 뜨개질하는 모습이란 꼭,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해진 옷을 깁고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말수가 적은 시골 양반이라 털모자 뜨기에 대한 부연 설명은 일절 없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 신생아들을 살리는 운동에 서툰 솜씨지만 직접 동참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자린고비 우리 영감님이 살다 보니 참 별일도 다 있습니다. 그러나 참 아름다운 별일입니다. 내가 평생 보아온 저 사람의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통이 넘치는 골목모퉁이를 돌아가면, 거리에 자선냄비도 곧 등장할 것입니다. 사실 나는 자선냄비를 보면 멀찌감치 돌아서는 사람입니다. 나도 먹고살기 어려운데 남을 도와줄 돈이 어디 있느냐며 나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애쓰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 영감님을 보며 다시 생각해보니 남을 도와줄 돈이란 따로 준비되어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작은 마음일수록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 나눔의 방식이 아닐까요? 올해는 나도 자선냄비 가까이 지나가야겠습니다.

글·유금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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