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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낙엽 따라 찾아온 첫사랑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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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늦가을이 되면 중년의 친구들이 간혹, 첫사랑 이야기를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육군참모총장 같은 한 친구가 어느 날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라고 권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 꽤 진지했다.

건실한 가장이고, 이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그 친구의 이야기는 고교시절의 간절한 첫사랑이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여고생을 몰래 쳐다보는 남학생, 하지만 고백조차 못한채 ‘짝사랑스러운’ 첫사랑은 끝나 버렸다고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그의 기억 속에서 더 아름답고 애절한 이야기로 스토리텔링 되었을 것이다.

짐작을 하면서 들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글로 옮겨 놓으면 허전해지기도 한다. 실화와 소설은 많은 차이가 있다. 세계의 명작 반열에 오를 그런 소설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속에 간절한 첫사랑을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날 그가 나에게 보여준 간절한 눈빛과 말투, 음성은 가슴에 오래 남는다.

보통 사람들은 마흔의 나이가 되면 제2의 사춘기를 겪는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갈 인생의 행로를 그때 바라보고 때론 무모하게, 때론 현명하게 어떤 ‘결정’을 한다. 그 즈음에 미친 듯이 달려온 경주마가 잠시 먼 초원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그런 시간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를 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거기에 있는 풍경 중의 하나가 바로 지나가버린 사랑이고, 그 사랑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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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11월의 초입에서 일기예보를 듣고 먼 숲을 바라본다. 일산 중산 고봉산의 낮은 숲이 울긋불긋 절정을 이루고 있다. 저 단풍진 숲의 아름다운 빛깔은 나무의 떨켜가 나뭇잎과 가지의 통로를 차단해 더 이상 에너지가 들어가지 않아 죽어가는 모습이다. 일몰이나 낙엽, 단풍이 아름다운 이유는 더 이상 푸른 기운이 삼투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소멸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들어올릴 기세로 힘을 쓰는 혈기방장한 시절이 지나고, 어느새 배가 나오고 팔다리가 가늘어지는 장터의 노새 같은 나, 자본과 물질의 틈바구니에서 비틀거리면서 걸어가고 있는 나, 내 몸에 무수한 떨켜가 생겨 나뭇잎처럼 물기가 다 빠져나가 떨어질 자리를 내려다보는 시간, 이 세상에서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서 빈 소주병처럼 광화문 사거리에 서 있으면 글쎄…,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때, 첫사랑을 떠올린다. 가장 적당한 시간이다. 첫사랑은 첫사랑이라고 느끼는 순간보다도 그것이 첫사랑이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 가을에 은행나무처럼 물들기 때문이다.

간혹,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라는 헛소리를 나도 하지만, 그건 수사이고 은유일 뿐이다. 한 사람의 기억에 최초라고는 할 수 없어도 최고의 순수한 기억 첫사랑. 올 겨울에는 친구의 첫사랑을 찾아주고 싶다. 그의 이야기를 세계의 명작으로 재탄생시켜 주고 싶다.

시인과 소설가는 사람들의 첫사랑을 찾아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와는 너무나 달라 조금 소원했던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그와 나의 거리가 조금은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이 가을에 작은 기쁨이다.

글·원재훈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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