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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가을이 깊었습니다. 단풍나무 아래 나지막한 평상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나는 백두대간 대관령 깊은 산속,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사는 시인입니다. 커다란 항아리에 누룩과 솔잎을 켜켜이 넣고 막걸리를 빚는, 백발노인이 있는 마을에 삽니다. 언젠가 그 술한 동이를 산 적이 있습니다.

플라스틱 통에 담기 싫어 내 어머니가 생전에 사용하시던 물동이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인생을 유랑하는 나룻배처럼 조롱박 하나 둥둥 띄워서, 무슨 보물단지 싸매듯 칭칭 동여매고 두툼한 이불을 두번 세번 더 둘렀습니다. 그렇게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설악산 만해마을로 기다시피 간 적이 있습니다. 만해 문학축전 행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시인들에게 내 고향 강원도 토종 막걸리 한잔씩 돌리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수십 명의 시인이 죽 둘러앉았고, 이 술을 빚은 노인과 재료와 과정을 간단히 소개하였습니다. 모두 술맛을 기대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날보다 손을 높이 들어 인생에 대해 건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술잔을 입술에 대는 순간, 시인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조금씩 일그러졌습니다. 원체 속 깊은 분들이라 크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들었던 잔을 내려놓고 두 번 다시는 입에 대지 않은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맥주와 소주와, 시중에서 판매하는 부드러운 맛의 막걸리로 즐겁게 지냈습니다. 술을 가져갔던 나는 그만 머쓱해져서 술이 절반 이상 남은 항아리를 칭칭 동여매고 이불로 둘둘 말아 우리 마을로 다시 가져왔습니다.

그 다음 날, 짭짤한 갓김치를 안주로 노인정에 모여 계시는 마을 어른들께 드렸는데, 이상도 하지? 산골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는 “캬~! 술맛 좋다”라며 구부정한 허리로 일어서서 어깨춤을 둥실둥실 추시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 하얀 노인들이 느리게 춤추는 모습이란, 마치 청산에 하얀 학이 날아가는 걸 보는 듯, 첨가물이 전혀 첨부되지 않은 삶을 보는 듯, 담백하고 여유롭게 느껴집니다.

언어에 대한 절대 미각을 가진 시인들이라 음식 맛에서도 텁텁하고, 씁쓸하고, 약간은 고린내 나는 누룩 맛과 진한 솔향에 취할 줄 알았는데, 우린 우리도 모르게 맛의 고향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의 맛 또한 달고 짜고 시고, 때로는 소태같이 쓴맛일 텐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단맛만 지향하게 되었고, 각종 향기를 내는 첨가물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전통음식인 떡도 지나치게 달콤해져 가고 부침개는 기름이 줄줄 흐릅니다.

문득, 인생의 소박하고 담백한 맛이 그리워지는 가을입니다. 달콤한 도시에서 왠지 조금은 쓸쓸하게 지내고 있을 것 같은 그대와 막걸리 한 잔 나누고 싶은 그런 가을입니다. 안주는, 단풍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글·유금옥 (시인·강릉 왕산초등학교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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