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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고구려에 망명한 북연 황제, 풍홍




북연을 둘러싼 사건(436년 고구려가 북연에 군사를 보내 인력과 물자를 약탈한 사건)이 벌어진 후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군사적 긴장 관계가 조성됐다.

사건 직후 북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북연 왕과 그 백성, 병력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장수왕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에 북위의 태무제는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다음 거사를 기약하자는 북위 낙평(산둥)왕 비(比) 등의 반대로 중지됐다. 이후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긴장과 대립 상태를 지속했다. 439년 이후 462년까지 양국 간에 한 차례의 사신 왕래도 없었다.

국제정세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정작 군사적 충돌은 고구려와 양쯔강 이남의 유씨(劉氏)의 송(宋) 사이에서 일어났다. 436년 장수왕은 북연 황제 풍홍과 북연인들을 랴오둥으로 옮겼다. 물론 이용가치가 없어진 풍홍에게는 황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양심이나 도덕?윤리에서 자유로운 사나이, 자기 목적을 수행하는 데서는 합리성과 현실적 유용성에 대한 판단만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나이, 이런 것이 고구려 국왕이기 이전에 거련(巨連?장수왕)이라는 냉혹한 사나이의 본질이었다.

장수왕은 망명한 자의 본질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풍홍이란 인간이 온갖 공약을 해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고, 상대해 주지도 않았다. 사신을 보내 조롱하기까지 했다.

“용성왕 풍군(馮君)이 벌판에서 행차하시느라 군사와 말이 피곤했겠습니다.”

풍홍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한심했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황제에게 왕이라니! 나는 천자다. 너희 왕에게 이 사실을 전하라!”




장수왕이 보기에 그건 완전히 허세였다. 모든 것을 잃고 고구려에 더부살이하는 처지가 아닌가. 북연은 중원에서 쫓겨나 요서의 지방 정권이 된 후연의 왕위를 풍홍의 형 풍발이 찬탈하고 세운 나라다. 풍홍은 형 풍발이 죽자 친조카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왕위를 차지한 인간 도살자였다.

그의 본처 소생의 자식 풍숭과 풍랑(풍태후의 아버지)은 아버지를 배신하고 북위로 망명해 북연을 망국으로 몰아가는 데 일조했다. 북연은 배신과 음모, 혈족 사이의 학살로 얼룩진 그야말로 저주받은 왕조였다.

장수왕은 냄새 나는 풍홍의 뻥에 기분이 상했던지 그의 거처를 랴오둥만과 가까운 평곽(平郭?현재 랴오닝성 능악성)에서 북풍(현재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도 풍홍은 자신의 나라에서 하듯 황제 행세를 했다. 백성을 마음대로 처리했으며, 형벌도 예전에 하듯 내렸다.

장수왕은 풍홍을 망명집단과 분리시켰다. 비서(侍人)들을 뺏고 아들 풍왕인(馮王仁)을 인질로 데려갔다. 북연인 사회를 해체해 고구려 사회 안으로 재조직하는 작업을 본격화했다. 풍홍은 분개했다. 그는 고구려를 발판으로 백성을 규합해 북연을 다시 일으켜 세울 계획이었다. 어려운 입장으로 몰려 망명한 왕들이 언제나 꾸는 헛된 꿈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해가 뜨면 사라지는 이슬 같은 꿈일지라도 마음속에 품어야 한다.

풍홍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수천 리 바닷길을 통해 밀사를 보냈다. 그의 밀서를 소지한 사신의 배가 남조 양쯔강 남의 송(劉宋) 조정에 도착했다. 풍홍은 송으로 망명하겠다고 요청했다.

풍홍의 밀서를 받아본 것은 송의 명군(明君) 문제(文帝?407~453)였다. 송은 문제의 아버지 유유가 동진의 마지막 황제 공제로부터 선양 받아 세운 왕조다(420년). 역사에서 그 나라를 유송(劉宋)이라 부른다.

아버지 유유는 재위 3년 만에 죽고, 형인 소제(少帝ㆍ406~424)가 17세에 즉위했는데 아주 못쓰는 방탕한 사람이었다. 유유는 어린 아들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후견인 네 명을 선발하고 죽었다.

단도제·서선지·부량·사회 등 4인은 황제가 사춘기라 방탕함이 고쳐지기 어렵다 판단하고 그를 죽이고 동생 유의륭(劉義隆)을 모셔와 재위에 앉혔다. 그가 바로 송의 문제였다. 그는 음모를 꾸밀 줄 아는 사람이었다. 4인방의 힘으로 황제에 올랐지만 그 존재 자체가 문제에게 부담이었다. 그는 단순한 사고를 하는 무장 출신 단도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나머지 3명의 대신을 죽이고 조정의 인사를 대폭적으로 교체해 정부를 새롭게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풍홍은 밀사를 통해 송 문제를 부추겼다.

“요동?요서에 송의 기지를 설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송 문제도 교활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망명자의 말을 믿는 그는 정치바닥에서의 내공이 장수왕보다 한참 아래였다. 이로부터 1050년 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 태어난 마키아벨리가 망명자의 말을 믿지 않았던 장수왕과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망명 중인 인간의 말을 믿으면 큰 위험이 뒤따를 때가 있다. 그들이 운운하는 신의와 서약은 휴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이다. …중략… 망명 중인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그들의 종국적 목적인 귀국 실현의 수단으로서, 그에 도움이 될 법한 사람의 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므로 실현 불가능한 일도 무엇이나 예사로 약속한다.”(정략론)

438년 문제는 일단 고구려에 사절을 보냈다. 왕백구(王白駒)라는 이가 단장이었다. 그들은 고구려에 도착해서 연왕 풍홍을 송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송나라의 말을 들어준다면 북위가 발끈 할 것이다. 북위와 외교문제로 비하될 풍홍이란 폭탄을 고이 보낼 장수왕이 아니었다. 악덕일지라도 장수왕은 고구려의 안정과 번영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행하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장수왕은 풍홍에게 자객을 보냈다. 풍홍과 그의 아들, 손자 10명이 비참하게 살해됐다.

풍홍과 그 일가족을 학살함으로써 북위와의 외교 문제 발발은 막았다. 하지만 그 불씨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몰았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30년 후 북위 조정에서 권력을 잡은 풍홍의 손녀딸 풍태후가 장수왕에게 외교적 압박을 가해왔다.




| 글 싣는 순서 |
① 다시 주목받는 백제 근초고왕
② 비운의 고구려 고국원왕
③ 광개토왕의 역사무대 등장
④ 광개토왕, 운명을 걸머진 자
⑤ 후연에 들어선 고구려 정권
⑥ 북위에 맞선 장수왕의 결단
⑦ 고구려 망명한 북연 황제, 풍홍
⑧ 장수왕의 중국 남북조 외교전략
⑨ 북위에 사신 보낸 백제 개로왕
⑩ 장수왕과 북위 풍태후
⑪ 백제 개로왕 일가의 몰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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