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트위터(X)에 대한 미국 언론의 초기 반응은 “와이파이 기반의 무료 문자 서비스가 등장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 건당 요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와이파이에만 연결되면 추가 비용 없이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이 큰 변화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따라 AT&T를 비롯한 미국 통신사업자들의 수익이 크게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CNN에서 하루 종일 이어졌다.
이후 트위터가 다중 간 소통 플랫폼으로 진화하자 일부 사회학자와 정치학자는 이를 숙의민주주의를 뒷받침할 새로운 기술로 해석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기존 언론이나 시민단체가 대규모 시민 토론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민주적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물적 비용이 필요했다. 트위터는 이 같은 집단 숙의의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이 손쉽게 합리적 토론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형성됐다. 이런 기대는 정치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공장(public sphere)’ 이론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던 참이었다. 얼마 후 트위터에 하버마스 이름의 계정이 생겼고 같은 논지를 반복적으로 트윗했다. 그러나 몇 년 후 하버마스는 자신이 만든 계정이 아니라고 밝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몇몇 하버마스 추종자는 트위터 출시 몇 년 전부터 민주주의적 공공장 이론에 대한 믿음을 잃던 중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파병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만 뜨거운 감자였던 게 아니었다. 당시 영국 노동당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전격적으로 결정했을 때 하버마스 추종자들은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 국가의 좌파 정부가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냐는 질문에 직면했다. 하버마스식 공공장이 영국에서조차 힘을 발휘할 수 없다면 과연 민주주의의 공공장이 현실화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이었다.
이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소위 정보통신기술(ICT) 때문에 벌어지는 반민주주의적 현상을 매일 목도하고 있다. 누리소통망(SNS)은 빛의 속도로 정보를 전파하지만 그 결과 필터버블(알고리즘이 특정 정보만 제공하는 현상)과 에코챔버(사용자가 정보를 선별·차단하는 현상)는 이미 일상의 경험이 됐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벌어지는 이 같은 살풍경에 어지러움을 느끼는 사이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기술 환경으로 급격히 끌려가고 있다.
AI가 무엇이며 어떤 결과를 낼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많지만 사실 확증된 것은 거의 없다. 이 중 하나가 AI가 민주주의를 악화시킬 것이라는 주장이다. 주장의 내용은 간단하다. AI가 답변을 만들 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답변 내용의 사실성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의 주목(attention)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사용자를 자신 앞에 묶어두느냐가 일차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많은 인지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복잡한 사실을 설명하기보다 당장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는 내용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사용자를 묶어두는 것은 사실 모든 SNS 서비스의 목표이기도 하다. 우리가 AI를 인간처럼 느끼는 건 우리를 감정적으로 묶어두기 때문이다.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 정보 판단에 써야 하는 ‘주목’의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희소해지며 그만큼 가치를 가진다. 이 과정에서 주목을 획득하는 가장 효과적인 정보는 사실이 아니라 감정이다. 오늘날 ICT 경제를 ‘주목경제’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정이 사실에 우선하는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 하에서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자는 말은 사치스럽기 그지없다. 사실의 닻을 놓치고 감정에 부유하는 집단 심성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스며들 때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질 것은 자명하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상상할 수 있는 AI가 초래할 민주주의의 위기다.
숙의민주주의와 경합적 민주주의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한 몇 가지 기대를 접는다면 이는 위기가 아닐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만인이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는 원칙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새로운 정치적 질서로 유럽에 소개됐을 때 이에 호응한 평민과 농노의 일차적 동기는 정치적 권력의 획득이 아니었다. 이들이 우선시한 것은 정치적 권력이 높아졌을 때 부수적으로 따라올 소득의 향상이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민주주의적 질서가 개인의 경제적 복리는 물론 국가경제나 인류 전체의 풍요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 제도만으로 경제 성장을 이룬 사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민주주의를 통한 또 다른 기대는 개인의 자유가 증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오늘날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벗어난 얘기다. SNS에서 우리는 우리와 견해를 달리하는 양극화 저편의 시민들,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마음속 자유의 총합은 민주화 이전의 그것보다 크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는 하버마스의 숙의민주주의 대신 경합적 민주주의(agonistic democracy)를 제안했다. 역사의 반동을 청산하면 아름다운 참세상이 올 것이라는 예언자적 도덕주의는 갈등이 초래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와 견해를 달리하는 반대자들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게 자유의 필연적 결과임을 인정하고 나아가 반대자들과 경합하는 과정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민주주의다. 이 민주주의는 우리를 부자로 만들지도, 우리 편이 항상 권력을 잡아 영구적인 자유를 선사하지도 않는다. 이 민주주의는 때때로 후퇴하면서도 기어이 버텨내는 중년의 삶 같은 것이다. 우리가 AI에 이식해야 할 민주주의 원리는 상대에 대한 인정이다. 상대를 절멸시키고 싶은 감정적 잔혹함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원재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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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