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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외교 혁신의 과제, 약소국 콤플렉스 극복



대한민국은 외교를 잘해야 하는 나라다. 분단국으로 전쟁 위협에 상시적으로 노출돼 있고, 주변국 모두 강대국 반열에 포함되는 나라라는 점, 천연자원이 매우 부족한 나라여서 무역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점이 대표적인 이유다.
2026년 벽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는 외교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러나 현실에서 한국 외교는 아쉽다는 평가가 많다. 외교 혁신을 둘러싼 의견도 분분하다. 혁신의 필요성은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지만 국가적 공감대를 얻을 만한 해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특히 한국 외교의 문제점과 그 원인·배경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장은 드물다. 그 결과 외교 혁신을 요구하는 주장은 구호에 그친 채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한국 외교 혁신 주장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약소국 콤플렉스다. 한국이 실제로 약소국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한국은 더 이상 약소국이 아니다. 그런데도 약소국 외교를 지향하는 역사적·심리적 구조는 여전히 작동한다. 약소국 콤플렉스는 외교 정책을 직접 규정하는 지침은 아니지만 외교 판단의 출발점이 되는 인식의 틀이다. 이러한 인식은 지정학(地政學)은 물론 시정학(時政學), 나아가 정책 결정자의 세계관 차원에서 다양한 오류로 연결된다.

약소국 콤플렉스가 만든 시대 착오
먼저, 지정학적 차원에서 약소국 콤플렉스는 사대주의를 부추긴다. 우리나라 외교에서 사대주의는 중세시대에도 존재했지만 19세기 말 이후 나타난 형태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시기 이후의 사대주의는 외교 정책 결정자들에게 국제 환경을 수세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심리적 반응으로 존재해왔다. 지정학적 제약은 모든 국가가 직면하는 현실 조건이지만 약소국 콤플렉스는 이를 객관적 분석의 출발점이 아니라 열등감을 강화하는 근거로 전환된다.
그 결과 외교는 자율적인 전략 설계보다 강대국 의중을 미리 헤아리는 데 집중하게 되고 협상력은 축소된다. 요구를 받기도 전에 양보를 거론하고, 강대국 의견 제시를 청구서나 압박으로 받아들이며, 선택 이전부터 움츠러드는 외교 행태는 전형적인 사대주의 증상이다.
둘째, 시정학적 차원에서 약소국 콤플렉스는 시대착오를 낳는다. 약소국 콤플렉스는 국제정치 변화의 흐름을 주도적으로 읽지 못하게 하고, 강대국 관료나 학자가 제시하는 개념과 이론을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과거 외교 실패 경험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만든다. 19세기 말 외교 오판과 국가 파탄의 경험을 현재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120여 년 전 극빈국이던 대한제국과 오늘의 대한민국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동일한 잣대로 한국 외교를 분석하고 토론하는 것은 허망하다. 국제질서가 빠르게 재편되는 상황에서 독자적 판단은 배제되고, 타이밍은 기회 포착의 대상이 아니라 위험 요소로 인식된다.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려는 노력은 위축되고 어느 편에 줄을 서야 할 것인가에 집착하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하나의 게임에 갇힌 외교
셋째, 세계관 차원에서 약소국 콤플렉스는 단층 세계관이라는 오류를 유발한다. 단층 세계관에서 외교는 하나의 무대에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단일 게임이며 각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제로섬 게임이다. ‘강대국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소국은 해야 하는 것을 한다’는 2000여년 전 그리스의 격언이 부동의 지침이 된다.
반면 다층적 세계관은 외교를 여러 무대에서 동시에 전개되는 복수의 게임으로 인식한다. 사안별, 층위별로 다른 상황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포츠에 비유하면 단층 세계관은 모든 나라가 우승을 놓고 겨루는 월드컵과 유사하다. 반면 다층 세계관은 다양한 게임에서 메달을 놓고 겨루는 올림픽과 유사하다. 약소국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국가에서 외교는 오직 하나의 승자만 존재하는 월드컵으로 인식된다.
약소국 콤플렉스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 뿌리는 19세기 말 제국주의 질서가 한반도에 남긴 충격, 특히 일제 식민사관에서 비롯된다. 외부에 의해 규정되고, 외부에 의존하며, 후발주자는 운명이라는 인식은 광복 이후에도 완전히 청산되지 못했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오늘날 획기적으로 격상된 우리 국력과 국제적 위상과 점점 더 어긋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 외교 혁신에서 시급한 과제는 제도나 조직 개편에 앞서 자기 인식의 전환이다. 약소국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면 사대주의는 반복되고, 시대착오는 고착되며, 단층 세계관을 벗어나기 어렵다. 외교에서 국력이나 지정학은 분명 중대 변수지만 유일한 변수는 아니다. 타이밍에 대한 분석 능력과 냉철한 세계관이야말로 지정학적 제약을 효과적 대응 전략으로 전환하는 핵심 변수다.
약소국 콤플렉스 극복에는 별도의 예산이나 특별한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를 중심으로 한국 지식인 사회가 의지를 갖고 노력하면 2~3년 내에도 충분히 전환이 가능하다. 다행히도 이재명정부는 이미 독자적 외교 전략 개념을 일부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재명정부 임기 내에 한 단계 도약한 외교 강국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왕선택
왕선택 서강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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