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념품으로 본 우리 역사, 우리의 기억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 ‘구슬’은 주인공 라일리의 기억을 의미한다. 수많은 구슬은 과거 속 장면을 하나씩 품고 그때의 감정에 따라 노란색, 빨간색 등 각기 다른 색깔로 기억 저장소에 존재한다. 여행지에서 산 냉장고 자석, 기념사진, 결혼반지 등 라일리의 구슬은 우리에게도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당연하게 여겨지다가도 문득 추억과 함께 그때의 감정을 되살리는 마법 같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국립민속박물관이 5월 27일부터 기획전시실에서 개최 중인 ‘오늘도, 기념: 우리가 기념품을 간직하는 이유’ 특별전이다.
특별전에선 조선시대 병풍과 일제강점기의 달력을 지나 현대의 방탄소년단(BTS) 응원봉으로 이어지는 여러 시대의 기념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누군가의 벽장 속에, 서랍 속에서 잠자다 세상 밖으로 나온 이 물건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물건들이 품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전시가 중반부를 넘어선 8월의 첫날 박물관을 찾았다.


누군가의, 우리의 삶을 되짚는 시간
전시장에 들어서자 관람객을 감싸듯 둥글게 늘어선 벽장이 눈에 띈다. 벽장 한 칸씩 차지한 에펠탑, 풍차 모형, 인형 안에 여러 개의 작은 인형이 든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제주 돌하르방 등 기념품들이 관람객에게 인사를 건넨다.
본격적으로 전시를 관람하러 가는 길, 좁고 굽이진 공간의 벽을 따라 작은 구슬들이 컨베이어 벨트와 유리관 등을 타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 길을 따라 걷자 구슬들이 한데 모인 곳이 나타난다. 다양한 색의 구슬들이 기억을 되짚는 길에 설렘을 더한다.
첫 기념품은 ‘평생도 8폭 병풍’이다. 19세기 말 가로 3.6m, 세로 1m 크기로 제작된 병풍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념될 만한 일들을 골라 그린 풍속화를 품고 있다. 각 폭에는 돌잔치, 혼례, 과거급제, 벼슬길, 관찰사 부임, 판서 행차, 정승 행차, 회혼식 등 각 삶의 전환점이 될 만한 순간이 그려져 있다.
여러 폭의 병풍으로 한눈에 인생의 흐름을 살폈다면 이제는 한 호흡씩 삶 속으로 들어갈 차례. 유려한 곡선의 태항아리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태항아리는 아이의 탯줄을 보관하는 작은 항아리다. 고운 항아리 속에 아이의 탯줄을 간직한 건 새 생명의 시작을 기념하고 아이가 무탈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겉 항아리 안에 작은 항아리가 더 들어 있는데 그곳에 동전을 깔고 비단으로 감싼 태를 넣었다고 한다.
타자기로 글귀를 입력해 만든 돌잔치 초청장과 초등학교 개근 메달, 대학교 졸업 기념 선물로 받은 탈도 인상적이다. 탈 안쪽에는 함께 나눈 시간에 대한 회상과 이별의 아쉬움, 격려의 뜻을 담은 학우들의 메시지가 있다. 군에서 전역하며 전우들의 이름을 전투복 겉면에 수놓은 기념품도 있다. 내피엔 탈과 마찬가지로 함께한 부대원들의 짤막한 편지가 적혀 있다.
그간의 공로에 감사하는 뜻이 담긴 선물과 은퇴를 기념하는 물건도 전시장 한쪽 공간을 장식하고 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돈을 모아 선생님께 선물한 근속 30주년 기념 라디오, 조선 후기 지방관을 지낸 홍기주가 은퇴하며 자신이 부임지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지도인 ‘환유첩’, 초산부(현재 평안북도 초산군)의 부사를 지낸 이만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바친 ‘만인산’ 등이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 우산 형태로 제작된 만인산의 천에는 제작에 참여한 2091명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다. 크기는 높이 2.5m에 너비 1.3m다. 1879년 제작된 만인산은 지나온 세월이 무색하게 보존 상태가 좋고 은은한 기품이 있다.
국보 ‘기해기사계첩’ 같은 장수를 기념하는 물건들도 있다. 기해기사계첩은 1719년 숙종이 주관한 경로잔치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자료다. 고령의 대신 11명이 참석한 잔치 그림에는 어좌가 반쯤 가려져 있어 임금은 보이지 않지만 임금 행차 시 따르는 붉은색 ‘둑’기(旗) 등이 양옆에 그려진 걸로 보아 임금이 참석했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국가 공식 기념품은?
1900년에 훈장 조례를 공포하며 공로가 뛰어난 이들에게 수여한 훈장 여럿과 고종 황제 등극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우표도 볼 수 있다. 서양식 제복을 입은 이용익의 초상화는 그 자체로 대한제국의 기념 훈장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이용익은 왕실재정의 총책임자로 활동했을 정도로 고종의 총애를 받는 관료였다. 초상화 속 그의 가슴에는 훈공 1등 팔괘대수정장, 고종 황제 성수 50주년 기념장 등이 달려 있다. 기념장은 중요 행사 때 제작해 참석자에게 나눠준 최초의 국가 공식 기념품이다.
세 장의 달력도 빼놓아선 안되는 전시품이다. 각종 기념일이 적힌 달력은 일상적인 물건이지만 때로는 시대적 상황을 기록하는 역사책과 같은 역할을 한다. 1945년과 1946년, 1949년 달력 비교가 이를 잘 보여준다. 1944년 제작했을 1945년 달력에는 8월 15일에 아무런 표시가 없지만 1946년 달력은 이날을 ‘조선민족해방기념일’로 기록했다. 그러다 1949년에는 이날을 ‘광복절’로 바꿔 표기했다. 이 부분만 보더라도 광복을 전후로 한 우리나라의 불안정한 사회상을 유추할 수 있다. 몇 해에 걸쳐 각종 기념일이 어떻게 생겨나고 소멸했는지를 살피는 것도 관람에 의미를 더한다.
독립선언서와 독립운동 장면이 한 장에 담긴 3·1운동 기념 포스터,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최초로 실시한 총선거를 알리는 포스터, 헌법 공포 기념사진 등 근대 역사의 중요 순간마다 제작된 물품들도 만날 수 있다.

추억 속 서울아시안게임·올림픽, 대전 엑스포
국내 최초 종합 국제 스포츠 대회인 1986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 서울올림픽 관련 기념품들은 5060세대를 그 시절로 소환한다. 아시안게임을 기념한 커프스(단추 없는 셔츠의 소매에 끼우는 작은 핀), 넥타이핀과 서울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 열쇠고리, 기념주화 등이다. 기념주화는 올림픽이 열린 해 태어난 딸의 탄생을 기념해 한 시민이 구입한 것으로 딸이 스무 살이 된 해 그에게 물려준 것이라고 한다.
꿈돌이 인형부터 배지, 책받침, 저금통, 깃발 모양의 장식품인 페넌트까지 1993 대전 엑스포 기념품도 다양하게 전시됐다. 공중전화카드같이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널리 쓰인 물건들도 대전 엑스포 기념품이라는 이름으로 한 공간을 차지해 추억을 되살리고 있다. 당시 공중전화카드는 아시안게임·올림픽과 같은 국가적 행사에 맞춰 처음 등장한 뒤 화폐나 우표처럼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수집품으로 자리 잡았다.


광장마다 넘실거린 붉은 물결과 힘찬 함성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2002 한일월드컵 기념품도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다. 빨간색 티셔츠의 가슴팍에 하얀색 ‘비더레즈!(Be The Reds!)’ 문구를 넣은 응원 티셔츠는 광장마다 넘쳐나던 열기와 함성을 재현한다.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제작된 이 티셔츠는 2000만 장 넘게 팔리며 대유행했다.
야구인들을 열광하게 할 만한 기념품들도 있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기념메달이다. 1982년은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해다. 해태타이거즈, 롯데자이언츠, MBC청룡 등 원년 6개 구단은 각각의 상징을 만들었고 팬들은 스티커와 패널처럼 작고 일상적인 물건으로 그 시작을 기억했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얼굴과 정보가 담긴 프로야구 딱지들을 살피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딱지 뒷면에는 포지션, 타율, 홈런 수, 계약금, 연봉 등 세부 정보가 있다. 어린이용 야구 백과사전과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의 K-팝 역사를 기념품과 함께 살피는 전시 공간도 있다. 주요 전시품은 동방신기의 세 번째 앨범 “O”-正.反.合., 샤이니의 2009년 미니앨범 2집, BTS의 BUTTER 앨범 등 K-팝 대표 가수의 앨범과 응원봉이다. 응원봉은 팬덤을 상징하는 빛을 내는 응원 도구다. 그룹 god와 샤이니의 팬들이 직접 제작한 플래카드와 각종 콘서트 티켓 등도 그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기념품 하면 떠오르는 단어 ‘여행’
‘여행’을 테마로 전시를 꾸린 공간도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철도호텔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 조선철도여행안내서, 금강산 책갈피 기념품 등이 전시된 이곳에선 1930년대 서울에 거주한 캐슬린 고먼이 고국의 어머니에게 금강산의 풍경과 여행의 즐거움을 글로 적어 보낸 엽서도 만날 수 있다. 금강산의 풍경을 인쇄한 엽서 뒷면에는 ‘산을 오르는 동안 거주할 수 있는 숙소는 없지만 여러 휴게소에서 음료수, 카드 그리고 산에 관한 기념품들을 구입할 수 있어요. 허리띠엔 조개껍데기로 만든 작은 컵을 매달고 다녔죠’라는 글이 있다. 당시 사람들이 어떤 차림을 하고 어떻게 금강산에 올랐는지를 상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경주의 관광지를 담은 필름을 네모난 장치에 넣고 버튼을 눌러 한 장씩 사진을 넘겨가며 감상할 수 있는 경주 관광 슬라이드, 수안보 온천 관광을 기념해 만든 구두 모양의 구둣주걱, 현충사 관광 기념 병따개 등 재미와 실용성을 갖춘 여행지 기념품들도 있다.
역사적인 기념만큼이나 개인들의 추억도 소중한 법.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완주 기념으로 받은 메달, 지역 축제 팔씨름 대회에 나가 받은 우승 트로피 등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기념품들도 만날 수 있다. 전시관 옆에는 기념품점이 있다. 관람을 마친 후 들러 그날의 경험과 느낌을 담을 무엇인가를 산다면 이번 전시의 가치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려나.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
‘오늘도, 기념: 우리가 기념품을 간직하는 이유’
전시기간 2025년 5월 27일~9월 14일
장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7, 기획전시실
관람시간 매일 오전 9시~오후 6시 (토요일은 오후 8시까지 개관)
관람료 무료
문의 (02)3704-3114
고유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