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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올해 2차대전 승전 기념식을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로 치를 계획이다. 푸틴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2005년은 나치를 물리친 '대조국전쟁'과 이로 인한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을 기념하는 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는 지난해 말부터 대통령행정실 행정처장(장관급)을 위원장으로 한 행사조직위원회를 구성해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번 행사에 세계 57개국 정상을 초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주요국 정상들을 포함해 우리나라와 북한도 함께 초청받았다. 단일 행사로는 최대 규모다. 지난해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에 16개국, 올해 1월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기념식에 20개국 정상이 참가한 것과 비교하면 행사 규모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부시 미국 대통령,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등 40여 국가 정상이 이미 행사 참가를 통보했다. 초청받은 나머지 정상들도 대부분 참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패전국 독일 총리도 첫 참석
특히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도 모스크바 승전 행사에 초청받고 참가를 공식 선언했다. 패전국인 독일의 총리가 러시아의 종전 기념식에 참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독일은 이번 기념식을 마지막으로 2차대전 당시 연합국의 승전 행사에 모두 참여하게 된다. 일종의 전후 청산외교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승전 기념식에서는 슈뢰더 총리가 나치 독일의 만행을 사과하며 극적인 화해의 드라마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60돌을 맞은 2차대전 승전 기념일을 두고 서방과 러시아는 각기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서방은 5월8일, 러시아는 9일을 승전 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독일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이처럼 이견이 생긴 데는 소련 지도자 스탈린의 아집이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독일이 연합국과 합의를 통해 처음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한 것은 5월7일이다. 항복문서에서 독일은 5월8일 0시를 기해 전쟁 행위를 종식하겠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서방은 전쟁 종식일을 기준으로 8일을 승전 기념일로 정했다. 반면 2차대전 말기 서방 연합국의 소련 고립 의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스탈린은 최초 항복문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소련이 부각되는 더욱 화려한 형태의 항복문서 조인식을 한 번 더 열 것을 요구했던 것.
전쟁 당시 소련의 커다란 공헌을 존중한 연합국의 동의로 베를린 시각 5월8일 22시43분, 독일군 대표가 소련의 전쟁 영웅 주코프 원수 앞에서 항복문서에 재차 서명했다. 독일과 2시간의 시차로 인해 소련시각으로는 5월9일이었다. 이어 같은 날 소련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이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입성했다. 이로써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유럽지역 대부분이 연합군의 손에 들어왔다. 이날 소련 최고회의(의회격)는 승전을 공식 선언했고, 스탈린은 승전 기념 특별연설을 했다.
[SET_IMAGE]5,original,left[/SET_IMAGE]이렇게 해서 5월9일이 소련의 승전 기념일로 굳어졌으며, 러시아는 오늘날까지 이 전통을 따르고 있다. 서방과 러시아가 다르게 정한 승전 기념일은 전후 연합국들의 분열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전쟁 후 악화된 동서 냉전은 이 같은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어떻게 보면 우스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같은 역사의 에피소드는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5년 승전 50주년 행사 때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서방 정상들은 5월8일 영국 런던에서 기념식을 한 뒤 다음날 모스크바에서 또 다시 축하행사를 여는 부산을 떨어야 했다. 올해도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냉전시절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2차대전에서 소련의 주도적 역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 이 같은 러시아의 불만은 상당부분 사실에 근거한다. 사실 유럽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에 맞선 소련군의 치열한 전투와 러시아 남부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의 승리가 2차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역사가는 거의 없다.
2차대전 중 소련 인명피해 2,700만 명
특히 1942년 7월부터 1943년 2월까지 계속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은 약 30만 명이 죽거나 부상하고, 약 10만 명이 포로로 잡히는 피해를 입고 소련군에 백기를 들어야 했다. 이 전투에서 패한 뒤 독일군은 카프카스 유전지대로의 진출을 포기한 것은 물론 전력상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 이 밖에도 러시아인들이 내세울 수 있는 2차대전의 영웅담은 끝이 없다고 한다.
나치 독일에 맞선 소련의 피해도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달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차대전 때 소련이 입은 인명피해가 2,700만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물론 군인 외에 민간인 피해자까지 포함한 숫자다. 하지만 미국이 약 55만 명, 독일이 약 325만 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수치임에 틀림없다.
소련 당국은 2차대전 이후 오랫동안 인구센서스 결과를 국가기밀로 지정해 공개하지 않았다. 전쟁 전후의 인구 비교를 통해 전사자 수가 알려져 스탈린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이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상자가 많았다는 얘기다. 러시아 한 여론기관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91%의 러시아인이 2차대전에 참전한 친인척이 있으며, 이 중 10%는 가까운 사람이 전쟁에서 희생됐다’고 답했다.
러시아는 2차대전 승전 기념일을 매년 최대의 국경일로 경축한다. 여기에는 나치 독일을 무찌른 것이 바로 소련이라는 러시아인들의 역사적 자부심이 깔려 있다. 러시아인들은 1812년 러시아를 침입한 나폴레옹군을 격퇴한 전쟁을 ‘조국전쟁’, 나치 독일과의 2차대전을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세계를 삼키려던 악의 세력을 물리쳤다는 민족적 자긍심이 함축된 명칭이다.
러시아 여론이 무리한 듯 보이는 정부의 대규모 승전 기념 행사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이 같은 민족적 자긍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도 낭비라고 질타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당장의 배고픔보다 민족적 긍지를 높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 활발한 정상외교 기대
러시아의 승전 기념 행사가 우리의 각별한 관심을 끄는 이유가 있다. 한반도 문제 해결의 전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아직 러시아 정부는 자세한 행사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모스크바 외교가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통해 대충의 행사 내용은 짐작해 볼 수 있다. 우선 세계 주요국 지도자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인 만큼 활발한 정상외교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 이라크 문제, 북한 핵 문제 등 국제 현안과 관련한 의미 있는 선언들이 발표될 수 있다는 예상이다.
상당수 전문가는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모스크바 승전행사 참가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본다.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 회담도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김 위원장 특유의 파격적 행보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SET_IMAGE]4,original,right[/SET_IMAGE]
김 위원장이 지금까지 ‘베일에 싸인 지도자’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국제무대에 전격적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그 사이 북핵 6자회담 참가국 간 북한의 핵 폐기와 북한 체제 인정 및 경제적 지원을 맞교환하는 빅딜에 어느 정도의 진전이 이루어질 경우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부시 2기 행정부의 대(對) 북한 유화 분위기는 이 같은 기대를 한층 부추기고 있다.
러시아는 공식적으로는 “승전 행사 기간중 남북정상회담을 별도로 준비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행사를 자국의 외교적 역량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으려는 러시아가 김 위원장 방러와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적극 나설 것이라는 예상이다.
러시아가 그 사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기를 희망해온 사실도 이 같은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중국에 빼앗긴 ‘한반도 문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되찾으려는 러시아의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석유·가스 등 에너지 공급 능력을 카드로 평양 지도부를 적극 설득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우리나라도 이번 기회에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겠다”고 밝혀 국외에서의 회담 가능성을 시사했다.
유철종 중앙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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