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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1945년 해방되던 해의 추석은 ‘눈물의 한가위’였다. 징용에서 돌아온 아들을 보듬고 촌로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자식을 둔 부모에게 추석은 명절이 아니었다. 그들은 옥처럼 맑은 햅쌀밥을 지어 놓고 절망적인 울음을 토했다.
아이들은 추석을 열흘쯤 남겨놓고는 “추석이 며칠 남았느냐”며 밤잠을 설치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어쨌든 추석 날 하늘은 티 없이 맑았고, 언제나 풍요로웠다. 가난한 집이나 돈 있는 집이나 이날 만큼은 아이들에게 고운 옷을 입혔다. 아이들은 송편을 손에 쥐고 온 종일 재잘거리며 동네를 쏘다녔다. 송편과 고깃국을 배 터지게 먹고 오후가 되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배앓이를 하는 것도 옛 추석의 동화(童話)였다.
[SET_IMAGE]4,original,right[/SET_IMAGE]한국전쟁 와중에 부산에서 추석을 맞은 피난민들은 제대로 차례상을 올리지 못했다. 송편도, 햅쌀밥도 없이 ‘유엔탕’이라고도 불렀던 ‘꿀꿀이죽’으로 차례상을 대신했지만, 그것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행복이었다. 물들인 미군복으로 추석빔을 대신하면서 곧 다가올 풍요한 세상을 꿈꿨다.
1960년대에 시작된 경제개발시대의 추석은 터져나갈 것같이 빽빽한 귀성열차로 상징된다. 부모님께 드릴 양과자 상자와 동생들에게 줄 나일론 양말 보퉁이를 끌어안고 사람들은 발 길을 재촉해 고향을 찾았다. 하루 12시간 공장노동에 시달리던 농촌 출신의 아들딸들은 부모님의 묘소에 소주를 따르며 도회지 생활의 고달픔을 잠시나마 잊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포니 자동차를 타고 온 자랑스러운 아들 며느리가 농촌의 부모들을 감격하게 했다. 전 국토에 깔리기 시작한 고속도로는 명절만 되면 귀성 차량으로 몸살을 앓았다. 전쟁 때 피난 행렬보다 더 긴 거대한 민족 대이동이 해마다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명절에 부모들이 농촌에서 서울로 차례를 지내러 오는 역귀성 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추석 선물 풍속도 급격히 변화했다.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는 계란꾸러미·고추·찹쌀·토종닭 등 1차식품이 주류를 이뤘다. 1960년대에는 설탕·조미료, 50개들이 라면박스가 선물 목록이었다. 특히 한 제당회사가 내놓은 30kg들이 ‘그래뉴설탕’은 부유층 간에 오가는 대표적 선물로 자리 잡았다.
[SET_IMAGE]5,original,left[/SET_IMAGE]1970년대는 라디오·스타킹·양산 등 경공업 제품이 추석 선물로 인기를 끌었다. 일부 부유층 가정에서는 흑백TV도 오갔고, 커피문화가 확산하면서 모 식품사의 ‘맥스웰 커피’가 고급 선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요즘의 가장 주고 싶은 선물은 현금이고,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백화점 상품권으로 조사됐다.
여전히 명절의 모든 즐거움 뒤에는 언제나 아내들의 힘겨운 노동이 있다. 차례 음식을 시장에서 사오는 경우도 늘어났지만, 우리의 여성들은 여전히 명절의 한켠으로 밀려나 엄청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SET_IMAGE]6,original,right[/SET_IMAGE]이제 한가위 잔치가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사이버 차례상이 등장했고, 사이버 동창회, ‘은사 찾기’가 성행한다. 나만의 아바타(사이버 분신)에게 추석 선물 챙겨주기도 예전에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RIGHT]한기홍 객원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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