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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만들면서 우리 조상님들 얼마나 많이 돌아가셨겠어?” “그러게 말이야. 나는 아직도 이 토굴에 오면 마음이 숙연해진다니까!”
매천리의 한 토굴로 취재진을 안내한 충북 영동군 관계자들은 담배를 꺼내 물면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 일제 말기, 일본은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이 일대 야산에 토굴을 만들었다. 탄약을 저장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삽과 곡괭이를 든 것은 영동 주민이었다. 패망한 일본은 남은 탄약을 모두 터뜨린 뒤 퇴각했다. 그리고 음산하게 남은 90여 개의 토굴은 주민들이 가까이 가기 꺼리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그렇게 60년의 세월이 흐른 2004년 9월, 그 토굴 안에서 40만 병의 포도주가 조용히 익어가고 있다. 전체 농가(9,256) 가운데 절반(4,602)이 포도 농사를 짓는 영동군. 이제 토굴은 영동의 꿈이 무르익어 가는 ‘희망의 곳간’이 됐다.
[B]넝쿨처럼 늘어난 포도농가[/B]
원래 포도 농사를 많이 짓기도 했지만, 영동군의 포도 농가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1990년대 초였다. 당시 포도 농사를 짓던 다섯 농가가 한 해에만 억대의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자 주민들은 너도나도 논을 갈아엎고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포도는 덕을 설치하고 안정적 수익을 거두기까지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기 때문에 작목 전환이 까다로운 작물이다. 영동군 문화공보과 신영철 계장은 “당시 갑자기 늘어난 포도 농가들이 망했다면 영동군 전체의 경제 기반이 흔들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급기야 군청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포도 경작을 말렸다. 하지만 “내 논 내가 갈아엎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호통만 돌아왔다. 살 길은 포도 가공 산업을 통한 유통의 다각화뿐이었다.
영동군청은 그때부터 경영수익기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군은 1994년부터 10년 동안 예산을 아껴 33억 원의 기금을 만들었다. 그러던 1998년, 한 가지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왔다. 바로 포도주의 ‘토굴 숙성’이었다. 아이디어의 주인공은 현재의 와인코리아 사장 윤병태 씨.
윤 사장은 와인 숙성에 최적 온도인 13도가 저절로 유지되는 토굴의 환경에 착안했다. 포도를 가공하기 위해 포도 막걸리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포도주 사업을 위해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의 제조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던 그였다.
윤 사장의 제안이 있은 뒤, 그때까지 모두 몇 개인지조차 알 수 없던 토굴에 사람의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검을 끝내고 상태가 좋은 3개의 토굴에 1억6,000만 원을 들여 진입로를 내고 전기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군청은 ‘포도주 토굴 숙성’ 방식을 군 사업으로 채택하고 군민주(株)를 모집했다.
[SET_IMAGE]2,original,center[/SET_IMAGE][B]토굴 주변 58만여 평, ‘과일랜드’ 조성 계획[/B]
하지만 주민들이 모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위험부담 때문이었다. 군은 농민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농민 대표단을 칠레와 일본 등지에 견학을 보냈다. 손문주 군수는 “직접 가 보고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군이 출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법 근거에 따라 한국자치경영평가원과 군 자체 자본투자심의위원회, 군 의회 등의 사업타당성 동의를 얻었다. 농민 대표단의 대답도 ‘OK’였다.
지난 5월, 영동군의 와인코리아주식회사는 그렇게 태어났다. 영동군이 48.9%(22억5,000만 원), 윤병태 사장이 49.1%(22억5,665만 원), 그리고 521명의 군민이 9,388만 원을 보탠 합작품이다.
와인코리아가 출범하면서 농민들은 당장 올해 포도 수매가에서 이익을 봤다. 포도주에 사용되는 포도는 열과(裂果, 껍질이 벌어져 떨어진 포도), 너슬포도(포도알 착립 상태가 성긴 포도) 등 하품(下品)들. 농민들은 지난해 이런 상태의 포도를 한 송이에 400원씩 받고 팔았지만 와인코리아는 올해 700원씩에 사들였다. 군청 상황실에 농민-군-회사가 모두 모여 결정한 가격이다. 와인코리아가 값을 올리자 다른 도매상들도 경쟁적으로 가격을 올렸고, 결국 1,300원까지 값이 뛰었다. 그렇다고 포도주 품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는 11월 출시 예정인 토종 누보 와인은 프랑스의 ‘보졸레 누보’에 비해 적어도 한국인의 입맛에는 더 맞는 것으로 확인됐다.
“시제품을 들고 서울로 올라가 대학생 100명에게 관능검사를 해보았습니다. 86명이 우리 누보 와인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윤 사장의 말이다.
영동군은 이제 본격적인 토굴 개발 사업에 나섰다. 군은 토굴 주위 58만여 평에 ‘늘머니 과일랜드’를 조성해 과일테마시설, 휴양시설, 골프장 등을 지을 계획이다. 포도를 주제로 한 카페와 전시장도 들어선다. 영동군의 과일랜드 사업은 지난해 행정자치부가 선발한 소도읍 육성 사업 심사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기업의 관심도 뜨겁다. 305억 원의 군비와 민간자본 1,280억 원을 투자하는 과일랜드 조성 사업에 벌써 한진그룹이 출자 의사를 밝혀왔다. 이미 개발한 3개의 토굴 중 하나는 지난해부터 샘표식품이 임대해 간장과 된장을 숙성시키고 있다.
손문주 영동군수는 “식품회사가 간장, 된장의 발효 상태를 보더니 내년부터 토굴 다섯 개를 빌려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토굴 개발비를 좀 내놓고 빌려 쓰라’며 배짱을 부리고 있지요. 우리에게는 아직도 토굴이 두둑하게 남아 있거든요.”
손 군수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충북 영동의 10월은 포도주 빛깔처럼 장밋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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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