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제23호>6자회담 - 위기에서 대화로
- 작성일
- 200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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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북핵 위기는 참여정부가 출범하기 5개월 전인 2002년 10월부터 시작됐다. 당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아태담당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 외무성 강석주 제1부상이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시인하면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돌발적 사건으로 1994년 10월21일 ‘제네바합의’ 이후 잠잠하던 북핵 문제는 또다시 초미의 국제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미국은 이 같은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이 제네바합의를 파기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제네바합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다양한 대북 압박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북한은 2002년 10월25일 전격적으로 ‘핵 동결 해제’를 선언하고 곧바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 핵 관련 시설에 설치한 봉인과 감시 카메라를 제거해 버렸다. 또 북한에 파견된 IAEA 사찰관을 추방하는 것과 함께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도 탈퇴했다.
미국도 이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그해 11월15일 미국 뉴욕에서 한국·미국·일본·유럽연합(EU)이 참여하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회를 열어 북한에 지원하던 중유를 그해 12월분부터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북핵 위기가 날로 고조되던 시점인 2003년 2월 참여정부는 출범했다. 참여정부는 제2차 북핵 위기라는 난국과 함께 시작한 것이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초반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의 강경 대응이 계속되면서 ‘북폭설’이 나오는 등 한반도에는 전쟁 위기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때 북핵 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선 나라가 중국이다. 북한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중국이 북·미 간 중재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북핵 해법은 겨우 실마리를 찾게 된다. 중국이 중재를 벌이게 된 데는 참여정부의 노력이 많은 역할을 했다. 당시 우리 외교당국은 북핵 위기 국면에서 중국에 북·미 간의 중재자 역할을 해달라고 계속 주문했다. 당시 우리 정부의 입장은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북핵 위기를 해결한다는 방침이었다.
이 같은 우리 정부의 기조는 2003년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을 정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 정책’을 지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2003년 4월23~25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북한·미국·중국 등 3국이 참가한 가운데 북핵 관련 3자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이 3자회담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3자회담에 대한 회의론이 불거지면서 한국과 일본까지 참여하는 5자회담을 논의하기에 이른다. 북한도 북·미 회담을 선행조건으로 다자회담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런 과정을 밟으면서 제2차 북핵 위기는 러시아를 포함한 6자 구도로 최종적인 모양새를 잡았다.
그 결과 역사적인 제1차 6자회담이 2003년 8월27~2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다. 그러나 제1차 6자회담은 애초 기대와 달리 공동성명 채택에 실패하고 각국의 입장을 확인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그 후속 회담에 대해서는 날짜조차 잡지 못하고 1차 회담이 막을 내리자 우리 정부는 2003년 안으로 2차 6자회담을 다시 연다는 방침에 따라 회담 참여국의 모든 채널을 가동해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정부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 각국 정상들과 회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핵 문제를 대화와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남북장관급회담 등 남북교류 창구를 최대한 활용해 북한을 6자회담장에 다시 끌어내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대화만이 해결책’ 우리 정부가 주도적 역할
우리 정부의 이런 일련의
노력으로 2차 6자회담이 드디어 2004년 2월25~28일 베이징에서 다시 열렸다. 이 회담
역시 여러가지 아쉬움을 남겼지만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2차 북핵 위기
이후 최초로 관련국들이 서면 합의를 남긴 점은 큰 성과로 꼽을 수 있었다. 또 차기
회담 날짜를 정하고 회담 내용을 사전에 조율할 수 있는 6개국 실무자 그룹을 구성하자는
데도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도 우리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돋보였다. 정부는 주요 사안에 대해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구상을 제시해 참여국들이 논의를 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했다. 또 정부는 회담을 진전시키는 기조는 한·미·일 공조에 두되 한편으로 북한을 설득하고 중국과도 적극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3차 6자회담은 2004년 6월23~26일 역시 베이징에서 열렸다. 3차 회담부터 미국은 조금씩 태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이 제안한 북핵 해결 방식은 미국과 리비아의 핵 문제 타결 방식과 비슷했다. 즉, 북한에 대한 영구적 안전보장, 북·미관계 정상화 논의, 일본과 한국의 대북 중유 제공을 대가로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추후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이를 폐기하자는 내용이었다. 북한은 이를 공식적으로는 거절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 제안을 신중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3차 6자회담 이후에도 북핵 위기를 풀기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특히 노 대통령이 선두에서 이를 이끌었다. 노 대통령은 2004년 11월12일 LA 국제문제협의회(WAC) 연설에서 “북한에 대한 강경노선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대화만이 해결책”이라는 점을 새삼 일깨웠다. 1주일 뒤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이런 관점을 재차 강조했다. APEC 정상회의 기간에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최우선으로 풀기 위해 한·미 양국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무력공격 의도나 적대정책이 없음을 강조해 시선을 끌었다.
이제 2차 북핵 위기는 4차 6자회담까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진정 국면을 맞고 있다. 물론 미국과 북한이 서로 완전한 신뢰를 구축하지 못해 아직 근본적인 자세 변화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북핵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일관된 노력으로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을 완화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북한도 한국정부의 이런 노력을 내부적으로 인정하고 4차 6자회담장에 나와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정부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와 달리 4차 6자회담부터 피동적 역할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문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최영재 기자
북핵 6자회담 일지 |
2002년 10월17일 미국 “북,
핵개발계획 시인” 발표, 2차 북핵 위기 2003년 4월23∼25일 베이징 북핵
3자회담(북·미·중) 2004년 2월25∼28일 베이징 2차 6자회담 2005년 6월17일 정동영 장관 김정일
위원장 면담 |
4차 6자회담 성사시킨 한국정부의 노력 |
참여정부는 2002년 10월부터 시작된 2차 북핵 위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이를 외교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푼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그런 노력의 대표적인 사례가 남북간에 구축된 기존 대화통로를 통한 직접 접근이었다. 정부는 핵 위기 국면에서도 남북 장관급 회담과 정부간 접촉 횟수를 크게 늘렸다. 2004년 6월에는 최초로 남북 장성급 회담을 성사시켰다. 또 우발적 사고와 오해로 인한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남북 쌍방이 동일한 주파수를 사용하는 ‘핫 라인’설치에 합의하고, 8월10일 시험통화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에서 서로 체제 선전방송 중지와 함께 선전물 제거를 합의해 현재 그 작업이 진행중에 있다. 그리고 정부의 ‘중대제안’즉 200만 kw 대북 송전 제안이 북한을 4차 6자회담으로 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5월16일 열린 남북 차관급회담에서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북측에 “중요 제안을 갖고 있다”고 처음 ‘중대제안’을 조심스럽게 거론했다. 이어 6·15 공동선언 5주년에 즈음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평양 방문이 결정되었다. 6월17일 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김 위원장을 만난 정 장관은 대북 송전이라는 중대제안을 했다. 김 위원장은 이 제안에 큰 관심을 나타냈고 결국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는 뜻까지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우리 정부는 곧바로 4차 6자회담을 위한 외교적 노력에 들어갔다. 6월18일 이종석 NSC사무차장은 당시 서울에 있던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를 만나 중대제안에 대해 설명했다. 6자회담 당사국인 중국과 일본, 러시아에도 외교 경로를 통해 차례로 설명해 동의를 얻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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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쉽지 않은 협상이었다. 회담이 시작될 때만 해도 첫 단추를 잘 끼웠다는 평가와 함께 이번에는 무언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2주간의 ‘끝장토론’으로도 결국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대신 일시 휴회라는 우회로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번 휴회 결정으로 4차 6자회담은 절반의 성공에 머무르고 말았지만 성과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북·미가 초보적 신뢰를 어느 정도 쌓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사실 북핵 문제 해결의 핵심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은 이번 4차 회담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실질적 대화를 나누었다. 단순한 만남을 넘어 이견을 조율하고 실제 협상이 진행되는 ‘양자회담’으로까지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막판에 결렬이라는 손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또다시 힘겨운 협상을 벌여야 하는 휴회를 택한 것도 사실은 북·미 간 초보적 신뢰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울러 한국의 적극적 역할 역시 이번 회담의 가시적 성과로 손꼽을 만하다. 회담 성사에서부터 진행과 합의문 도출과정에 이르기까지 한국정부의 역할은 단연 돋보였다.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남북, 한·미 양자 접촉을 통해 북·미 간 접점 찾기에 나선 한국의 돋보이는 역량은 4차 초안을 놓고 북·미가 결정적으로 대립할 때 남·북·미 3자접촉을 주선해 낸 데서 바로 확인되기도 했다.
이번 회담이 절반의 성공인 것은 일정한 성과를 냈음에도 마지막 산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북·미가 초보적 신뢰를 쌓은 것은 분명 성과였지만 그 신뢰가 마지막 장애물을 넘을 만큼 단단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역시 본질적 부분에서는 북·미 간 불신이 가로 놓여 있었다. 이는 최종 합의문을 도출하는 데 결정적 난관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한국 정부의 역할 돋보여
마지막 쟁점이었던 이른바 평화적 핵 이용을
북한이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를 전략적으로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논리적 정당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려는 집착이
컸다. 미국의 적대정책과 핵위협에 대한 자위력 차원에서 핵을 개발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로 핵무기는 포기하겠지만 에너지로서 평화적 이용은 정당한
권리라는 일관성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덧붙여 1994년 제네바합의의 정치적 정당성과 함께 경수로 건설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핵의 평화적 이용은 상징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또한 한국이 제시한 중대제안의 미비점, 즉 북한 영토 밖에서 전력을 얻어 써야 한다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차후에라도 자국 내에 발전소를 건설하려면 응당 핵의 평화적 이용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무엇보다 북한이 핵의 평화적 이용을 끝까지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미국에 대한 불신이었다. 북한이 핵을 폐기한 후 미국이 과연 자신들에게 상응한 조치를 해 줄 것인가라는 믿음이 없는 상황에서 당연히 북한은 핵 포기 이후에라도 미국을 다시 위협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평화적 이용을 앞세운 원자로의 유지가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핵무기와 핵물질은 폐기한다 하더라도 발전용 원자로를 확보하면 미국이 약속대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때 언제라도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고 플루토늄 추출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의 평화적 핵 이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은 북한의 행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투명한 검증을 동반한 평화적 핵 이용이 모든 국가의 일반적 권리임에도 미국은 도저히 북한의 발전용 원자로를 선뜻 허용할 수 없었다. 미국에게 북한의 원자로는 1994년 1차 핵위기 때나 이번에나 언제라도 핵물질과 핵무기를 만들고 위협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13일간의 지루한 협상이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휴회로 결말난 데는 기실 북·미 간 불신이 가장 큰 이유로 자리 잡고 있다. 물론 과거에 비해 양측의 신뢰가 형성되고 있다는 긍정적 조짐도 있다. 그럼에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마지막 산에 도달할 정도로 힘 있는 신뢰는 축적되지 못했음을 역으로 입증한 셈이다.
북·미간 셔틀외교로 접점 찾아야
그러나 회담이 재개될
때까지 마냥 쉴 수는 없다. 북한과 미국 모두 휴회 기간에 양자접촉을 한다고 밝혔다.
회담 재개 의지가 확고하기 때문에 우선 미해결 쟁점을 놓고 북·미 간 협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4차 회담 복귀 과정에 이바지했던 북·미 간 뉴욕 직접 접촉과
이미 호흡을 맞춘 ‘힐-김계관’ 채널이라면 무조건 결렬보다 성의를 다해 대화를
지속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초보적 신뢰가 유지된다면 북한과 미국 모두 최종 결렬보다
어렵지만 합의 도출에 적극 나설 것이다.
[SET_IMAGE]4,original,left[/SET_IMAGE]특히 차관보급 이상의 고위 북·미 접촉이 이루어진다면 정치적 타결이 더 쉬워질 것이다. 양측 모두 이번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짐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결렬의 공포’가 북한과 미국 의 협상을 파국이 아닌 합의로 이끄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쉬는 기간에 한국은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북·미 간 셔틀외교를 통해 접점 찾기에 적극 나서는 수밖에 없다. 물론 북·미 양측 강경파의 주장을 막아내는 것은 당연한 전제다.
우선 확보한 남북 채널을 가동해 북한의 진심을 읽고 북한의 유연한 태도 변화를 설득하는 것은 여전히 포기해서는 안 될 일이다. 특히 8·15 광복절을 맞아 남북 공동 행사를 준비하고 있고, 이 자리에 북측의 비중 있는 인사가 정부대표단으로 참석할 것이다. 그런 만큼 남북 고위급이 이견을 조율하도록 적극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미 공조를 더욱 강화해 미국의 대북 불신을 누그러뜨리고 더욱 적극적인 대북 협상을 설득하는 것 역시 남북 채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핵 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을 성과로 인식시켜야 한다. 또 핵 폐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린 북한이 미국의 상응 조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평화적 핵 이용을 고집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야 한다. 더불어 휴회 기간 북·미 양자 접촉을 적극 주선하는 것도 한국이 빠뜨려서는 안 될 일이다.
이번에 한국정부가 보여준 적극적 중재 역할은 여전히 기대할 만하다. 남북관계와 한·미관계를 병행하는 한국이 양자를 설득할 수 있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부지런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하더라도 북핵 해결의 원칙과 상호 필요사항 정도로 포괄적 합의를 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일단 필요한 보따리를 풀어 놓고 각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만 합의해도 북핵 문제는 해결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순서 맞추기는 그 다음에 해도 될 일이다.
이번에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것은 ‘공동성명(statement)’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 이후 합의서(agreement)에서 처리해도 될 것이다. 다시 열릴 4차 회담 때까지 한국은 물론 북한과 미국 모두 불신을 줄이고 신뢰를 쌓아 나가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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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교준 연합뉴스 정치부 통일외교팀 기자
“13일간의 대장정 끝에
휴회라니….” 한반도의 명운을 가를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 2주간 숨가쁘게
달려왔던 남북한과 미국·중국·일본·러시아 6개국. 길고 긴
협의가 결과 도출로 이어지지 못하고 8월7일 휴회에 들어가자 회담장 안팎에서는
이런 아쉬움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2002년 10월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 처음으로
참가국 모두, 특히 북·미 양국이 ‘속살’을 다 내비치면서 토론하고 합의에
거의 이를 뻔했다는 점에서 어느 때보다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회담 당사자와 관찰자 모두 다음을 기약하고 있다. 가능성이 비친 탓이다. 회담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달 마지막 주에 다시 열릴 회담을 ‘5차 6자회담’이 아닌 ‘4차-2회담’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한국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다음 회담은 중국의 4차 초안에 기초해 시작할 것이며 새 출발이 아니고 지금 과정의 연속”이라는 말로 다음 회담을 정의했다. 중국의 수석대표인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은 휴회 결정 후 의장성명(chairman’s statement)에서 “휴회 기간에 관련국이 의사를 긴밀히 교환할 것이기 때문에 추진력이 상실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휴회의 의미를 전했다. ‘결렬’이 아닌 ‘타결’을 위한 쉬어가기라는 것이 이들의 주된 메시지다.
그러나 낙관하기에는 변수가 적지 않아 보인다. 당장 2004년 6월26일 3차 6자회담 폐막 당시, 그해 9월 제4차 6자회담을 열기로 약속하고도 13개월을 돌아와야 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특히 이번 4차 6자회담에서 평화적 핵 이용권이라는 원칙이 충돌해 휴회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문제다. 미국과 북한 가운데 어느 한쪽이 기존 주장을 접지 않는다면 회담을 다시 열어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한쪽에 똬리를 틀고 있다.
‘휴회’는 ‘타결’ 위한 쉬어가기
이미 미국과 북한 내 강경파들은
‘6자회담 무용론’을 적극 제기할 태세다. 북·미 양측의 전선 사령탑인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겨냥한 내부 공격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주도적 역할로 성가를 내고 있는 한국정부는 회담의 탄력이 떨어질까 싶어 후속 협의에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휴회 결정 다음 날인 지난 8월8일 정동영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겸 통일부 장관 주재로 고위전략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정부는 지난 2주간의 회담을 평가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를 바탕으로 8월 둘째 주 안으로 중국과 협의하고, 셋째 주에는 미국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일본과 차례로 접촉할 계획이다. 중국과 미국에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러시아와 일본에는 각료급에 준하는 정부 인사를 보내 6자회담 수석대표보다 윗선에서 조정을 시도한다. 8·15 행사 기간에 방한 예정인 김기남 북한 노동당 중앙위 비서의 카운터 파트로는 정동영 장관이 나선다. 이 기회를 대북 설득 통로로 최대한 활용한다는 것이 정부의 의지다.
제4차 6자회담을 복기해 보면 한마디로 기록적이다. 본회담을 13일간이나 했고 남북 접촉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양자협의에 돌입하는 데는 15일이 걸렸다. 참가국 가운데 가장 먼저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북한을 기준으로 한다면 17일 만에 휴회가 이뤄졌다. 과거 세 차례의 6자회담과 달리 큰 기대 속에 출발했고, 실제로 회담 중반까지 낙관적 전망이 회담장 주변을 지배했다.
남북한과 미국을 포함해 모든 참가국 대표들이 이번만은 합의문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넘쳤다. 이 때문인지 회담은 애초 ‘끝장토론’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처럼 장기간에 걸쳐 진행됐다. 회담은 지난 7월26일 공식 개막했지만 그에 앞선 24일 베이징 시내 모처에서 남북 수석대표의 물밑접촉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사실상 회기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끝장토론’ 분위기
7월25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6자회담 개막에 앞서 북·미 수석대표인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회담장인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만났다. 이 만남은 회담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은 제4차 회담에
앞서 7월9일에도 ‘베이징회동’을 한 바 있다.
과거에는 개막식 직후 기조연설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순서를 바꾸었다. 개막 후 다각적인 양자접촉으로 의견을 조율한 뒤 이튿날인 7월27일 전체회의를 하고 6개국이 기조연설을 통해 자국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것도 긍정적 신호였다. 이로써 회담은 본격 레이스로 내달렸다.
회의 방식도 업그레이드됐다. 전체가 모이는 회의는 거의 없이 양자접촉을 중심으로 입장차이를 좁히는 작업, 말 그대로 협상이 쉼없이 진행됐다. 회담 대칭선상의 북한과 미국은 어느 때보다 양자접촉을 활발히 벌이면서 카드를 하나씩 제시하는 등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손꼽아 보니 북·미 양자협의 횟수는 8회에 이르렀다. 비공식적 접촉을 포함하면 수십 차례였다. 길어야 기존의 3박4일보다 2∼3일 늘어난 1주일 정도로 예상됐던 회기는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지대 주장과 미국의 인권·미사일 문제 제기가 접점을 찾지 못할 경우 단기간에 회담이 끝나리라는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회담이 교착 국면으로 들어설 조짐이 보이자 이번 회담을 통해 ‘중재자’ 역할을 확실히 찾은 한국 대표단은 북한과 미국을 번갈아 만나면서 설득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양측 간의 오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의장국인 중국도 회담이 속도를 내지 않자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부 상무부부장이 지난 7월28일 직접 참가국 수석대표를 위한 만찬을 열며 “댜오위타이(낚시터라는 뜻)에서 대어(大魚)를 낚자”며 각국을 독려하고 나섰다.
그런 가운데 회담 개막 이후 첫 주말인 지난 7월30일 중국이 각국의 입장을 전달받아 만든 공동 문건 초안을 회람시켰다. 그날 저녁 베이징 시내의 유명한 북한식당인 ‘해당화’에서는 유례없이 북·미 단독 만찬이 성사되기도 했다. 이는 양측이 공식 회담장을 벗어나 자연스러운 대화로 회담 의지를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이 미국에 한턱 냈다는 후문이다.
북·미 간 유례없는 ‘해당화 만찬’
중국이 공동 문건 초안을
내놓은 뒤 각국은 본국과 보고와 훈령을 주고받으며 막판 입장 조율에 들어갔다.
중국은 이것을 토대로 다시 공동 문안을 고쳐나갔다. 그렇게 초안을 고치고 또 고쳐
4차 수정안이 제출된 지난 8월2일 대외적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북한대사관 앞에서 밝은 표정으로 기자들 앞에 나섰다. 그는 “미국의
핵 위협이 제거되고 신뢰가 조성되면 핵무기와 핵무기 관련 계획을 포기할 결심”이라며
“의견차이도 있지만 최대한 좁혀 결과물을 마련하겠다”고 언급해 회담 타결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6자회담이 시작된 후 가장 유화적인 북한의 발표였다.
[SET_IMAGE]6,original,right[/SET_IMAGE]힐 차관보도 “4차 수정안은 좋은 안”이라고 했고, 송민순 차관보도 “합의된다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말하는 등 베이징 외교가는 타결 기대감이 한껏 높아졌다. 합의문 수준도 이전의 의장성명보다 격상된 공동성명 형식으로 발표될 것이라고 회담 관계자들이 확인하기도 했다. 국내 언론들의 성급한 보도가 쏟아진 것도 이 시점이다.
그러나 북한과의 회담은 쉽지 않다는 경험 원칙은 또다시 확인됐다. 중국이 세 차례 수정 뒤 제시한 4차 수정 초안에 대해 북한만이 사인할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회담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힐 차관보는 8월3일 밤 지친 표정으로 “이제는 북한이 선택해야 할 때”라고 북한을 압박하고 나섰다. 회담이 극적 타결과 결렬, 휴회의 갈림길에 선 8월4일 각국은 막판 담판을 시도했지만 북·미 간 입장차이는 줄지 않았다. 결국 회담이 깨지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렀다.
이번에는 한국 대표단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한국은 주머니 속에 숨겨뒀던 마지막 카드인 남·북·미 3자회동을 전격 성사시켰다. 회담 타결을 시도하는 동시에 결렬을 사전 차단하려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사실 이때 중국은 휴회하기로 작정하고 8월4일 밤 수석대표회의를 통해 휴회를 관철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의 요구에 중국은 한발 물러서야 했다. 중국은 “회담은 계속된다”며 한국의 의견을 존중했고, 3자회동 뒤 한·미도 회담 지속을 거론했다. 북한 김계관 부상도 이날 밤 대사관으로 들어가면서 “회담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해 정말 ‘끝장토론’으로 가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사실 핵 문제와 관련해 남·북·미 회담은 유례 없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도 충격을 받았다는 말도 있다. 회담기간 내내 북·중·미 회담을 주선하려고 했으나 완강히 거부하던 북한이 남·북·미 회담을 수용하자 적지 않게 놀랐다는 것이다.
북 대표단, 신중하면서도 탄력적 태도 ‘눈길’
그러나 북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김계관 부상이 평화적 핵 활동을 허용하지 않은 점과 핵 포기에 대한
상응 조치에 문제가 있다고 공식화하면서 더 이상 양보할 수 없음을 내비쳤다. 이
때문에 중국은 지난 8월5, 6일 이틀간 북한과 미국을 집중적으로 접촉하며 합의를
시도했지만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며 꿈쩍 않는 두 나라 사이에서 속만 태웠다.
결국 더 이상의 협의는 시간만 소모한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졌다. 참가국들은 8월6일
저녁 휴회 검토에 들어가 회담 개막 13일째이자 두번째 일요일이었던 8월7일 전격
휴회를 선언했다. 대표단은 3주 후를 기약하고 본국으로 향했다.
여운은 남았다. 북한 대표단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면서도 탄력적인 태도로 눈길을 끌었다. 특히 김계관 부상은 회담 개막 8일째 저녁 베이징 자국 대사관 앞에서 “오늘 회담이 일찍 끝나 도덕적 의무감에서 여러분을 만나러 왔다. 여러분, 더운 날씨에 취재하느라 수고가 많다”며 시종 환한 표정으로 취재진을 놀라게 했다.
회담 개막 사흘째인 지난 7월28일 57번째 생일을 맞았던 송 차관보. 호텔 측 배려로 케이크를 마련해 “잠시 동안이라도 회담 이야기는 하지 말자”며 시작된 간이 생일잔치는 “회담이 잘 돼야 할 텐데…”라는 송 차관보의 걱정으로 다시 대책회의로 바뀌었다는 후문이다. 회담이 풀리지 않으면서 목이 탄 탓인지 댜오위타이에서 소비된 생수가 5,000병, 커피가 2,000잔을 넘어선 것이 회담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6자회담의 휴회와 관련해 미국 언론들은 북한의 경수로 건설 재개 요구 때문이라는 힐 대표의 발언을 부각시켜 보도했다. 즉, 이번 휴회는 북한 지도자가 전략적 결정을 내리도록 부추긴 것이라는 해석이다. 일본 언론들은 북한의 ‘핵 평화 이용권’ 인정 여부를 둘러싸고 회담이 다시 열려도 북·미 간 대립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 언론은 공동 합의문이 6자회담의 성패를 좌우하는 기준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뉴욕타임스>는 8월8일자에서 미국과 북한이 회담 교착 책임을 서로 상대방에 떠넘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즉, 힐 대표가 “북한이 예고 없이 경수로 가동 권리를 뒤늦게 요구하는 바람에 협상 과정이 탈선했다”고 주장했고, 김계관 부상은 “미국은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에 대한 타협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8월8일자는 이번 회담에서는 북한 비핵화의 범위가 걸림돌로 작용했으며 북한은 클린턴 정부가 약속한 2기 경수로를 다시 건설해 달라고 거듭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북한을 설득해 협상 테이블로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회담이 휴회되어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이나 여전히 해결책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의 <닛케이> 8월7일자 사설에서는 북한의 양보 없이는 성과를 바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사설은 6자회담의 성패는 북·미 양국, 특히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전했다. 또 이번 회담은 전례 없이 냉정하고 실무적인 분위기에서 시작해 기대가 높았으나 핵의 평화적 이용을 둘러싼 대립이 공동 합의문을 작성하는 데 최대 장애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중국의 <런민르바오(人民日報)>는 8월8일자에서 6자회담은 끊임없이 전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낙관적 견해를 표시했다. 즉, 현재 세계에서 관계국들이 평화스러운 분위기에서 잘 논의할 수 있는 핫 이슈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번 회담은 그 자체로도 긍정적인 것이라는 분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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