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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의 결혼식 풍속도는 전통 혼례가 단연 압도적이었다. 이 전통 혼례에 대한 뿌리 깊은 선호의식은 신식 결혼식이 대부분인 최근에도 ‘폐백’ 등의 의식을 통해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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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부 지식 계층이나 부유층의 ‘신식 결혼식’ 또한 적잖았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신식 결혼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알려진 나혜석이 그 주인공이다. 신식 결혼식장이 서울에 첫선을 보인 때는 1930년 무렵이다.
본격적인 신식 결혼은 1950년대 말부터 시작돼 1960년대에 들어서서야 대중들의 결혼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초창기 신식 결혼식은 2∼3시간씩이나 소요됐다. 신랑과 신부는 물론 그 친구들도 따라 입장했다. 이 시기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가 식순에 들어 있는 것도 특이했다. 요즘과 다르게 내빈 축사를 4∼5명이 하는 경우도 있어 당시 결혼식은 그야말로 ‘지루한 행사’였다.
주례의 혼식(婚式) 선언 후 신랑 신부의 약력 소개가 있고, 신랑 신부 맞절과 예물 교환이 있으며, 주례사에 이어 축가, 신랑 신부 측 가족 인사로 이어지는 ‘30분짜리 공장 제품 같은’ 결혼식은 1963년 「가정의례준칙」이 발효되면서 일반적 결혼식 풍경화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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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풍속도에 혁명적 변화가 시작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다. 결혼을 하나의 ‘이벤트’로 격상시키며 형식적인 의례 대신 일생 동안 기억에 남는 축제로 승화한다는 것이 요즘 신세대의 결혼식 경향이다. 지난 5월 신라호텔 대연회장에서 열린 결혼식을 한번 들여다보자. 사회자가 식이 시작됐음을 알리자 5인조 재즈 밴드의 경쾌한 음악이 울리면서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입장한다. 물론 신부 아버지가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주는 순서도 없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신부 부모가 그동안 갈고 닦은 사교춤 솜씨를 뽐내기 시작했다. 딸을 보내는 순간, 딸과 사위에게 축하한다는 의미로 춤을 선사한 것이다. 하객들은 독특한 이들의 결혼식에 환한 웃음과 박수를 보내며 같이 즐거워했다.
지루했던 결혼식 식순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주례 대신 신랑 신부를 잘 아는 가까운 친지들이 덕담을 해주는 시간을 갖거나 신랑 신부 스스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다짐하는 글을 낭독하기도 한다.
결혼식 자체가 점차 소규모화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꼭 참석해야 할 사람만 초대하는 경우가 많아 ‘50+50 결혼식’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하객 100명 이하의 단출한 결혼식도 꽤 느는 추세다.
청첩장을 보내고 나서 회답을 받아 결혼식 전에 정확히 결혼식 인원을 확정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유학·여행·이민 등 해외 경험을 한 국민이 많아지면서 나타난 신풍속도다.
허례가 사라지고 개성과 실속이 강조되는 결혼식 풍속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RIGHT]한기홍 객원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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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