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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평범하지만 특별한 7人7色 가족 이야기

가족의 달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족과 관련한 기념일도 참 많습니다. 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날, 15일 가정의 날, 16일 성년의 날, 21일 부부의 날입니다. 참 11일 입양의 날도 있습니다.

특히 최근 끔찍한 아동학대사건이 연이어 밝혀져 더욱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내를 대신해 아이를 키우기 위해 육아휴직을 낸 남편, 경찰관 아내, 입양으로 가정을 꾸린 엄마, 다문화가정 결혼이주여성, 재취업 여성은 물론 생애 첫 내 집을 마련하고 행복한 가족의 미래를 설계하는 젊은 주부 등 평범하지만 특별한 7인 가족의 색다른 가족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정책도 정리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가정이 웃음 넘치는 5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족의 달

육아휴직 장동중 씨가 말하는 ‘육아의 감동’

“우리 곁에 온 천사, 삶의 기준이 바뀌었다”

내가 아이를 돌보게 된 것은 아내가 1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직장에 복직하면서다. 2013년 8월에 태어난 아이는 당시 18개월 된 갓난아이였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돌봐야 할 나이였다. 순간 머릿속에 ‘이번 기회 아니면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어렵겠지’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결국 직장에 1년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집안일은 단순했다.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린 후 빨래를 짜서 건조대에 널었다. 청소기는 돌릴 수 없었다. 아이가 잠든 사이에 청소를 해야 했기에 걸레를 사용해야 했다. 이 정도면 할 만하다 싶었는데, 복병은 따로 있었다. 아기를 돌보는 일은 단순하지 않았다. 스펙터클했다. 아이가 배고파하면 밥을 먹이고, 칭얼대면 놀아주거나 기저귀를 갈아주면 됐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다. 아이는 이유 없이 울고 칭얼댔다. 졸려서 그런 줄 알고 자장가를 불러줬더니 자지러지게 울었다. 기저귀는 아직 뽀송뽀송하고, 밥은 아까 먹였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우연히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댔는데 뜨거웠다. 열꽃은 피고, 아기는 보채고, 도와줄 사람은 없고…. 아내가 퇴근해 집에 오고 나서야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아이를 어르는 아내를 보면서 아내의 노고와 헌신을 다시금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아내와 어머니가 대단해 보였다.

이를 계기로 내 삶의 기준이 ‘나’에서 ‘가족’으로 바뀌었고, 가사와 육아에 적극 동참하는 남편이 됐다. 비록 육아휴직으로 경제적인 타격이 있었지만 이보다 더 큰 걸 얻었기에 괜찮다. 당시 아이와 교감을 쌓은 덕분에 요즘도 아이는 잘 때 내 옆에 붙어서 잔다. 잠든 아이의 모습은 마치 천사 같다. “아빠가 너를 지켜줄게. 사랑한다. 아들.”

 

가족의 달

이설아 씨의 ‘사랑으로 맺은 가족’

“가슴으로 낳은 세 아이… 최고의 보물”

우리 부부는 세 아이를 가슴으로 낳았다. 2008년, 2010년, 2013년 공개 입양으로 세 아이를 얻은 것이다. 하늘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이다. 내 배로 낳은 건 아니지만 내 속에서 낳은 거나 다름없다. 입양 과정뿐만 아니라 입양 이후에도 수많은 진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일부 입양가정은 생후 1년이 넘은 아이나 남자아이를 선호하지 않는다.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신생아나 성격이 온순한 여자아이를 입양하는 게 상대적으로 키우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생후 1년이 넘은 남자아이들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순간마저도 소외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자꾸 눈에 그 아이들이 아른거렸다. 부부는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고 했던가.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남편이 내 뜻을 따르겠다고 했다.

남편은 입양 과정이 순탄치 않을 때마다 버팀목 역할을 했다. 2010년 다섯 살이던 미루를 만났을 때 아이의 첫인상은 어두웠고 작고 초라했다. 남편은 아이에게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며 친해지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우리 부부는 미루와 2010년 봄부터 연말까지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미루는 여전히 우리 부부를 경계했다. 입양을 포기할까 고민하는데 남편이 내 손을 잡으며 “아이의 손은 쉽게 놓는 게 아니야”라고 격려해주었다. 그때 남편이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입양은 우리 부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미술 강사로 활동하던 나는 입양 경험을 토대로 다른 입양부모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국입양홍보회 입양 세미나 부모교육 강사로 활동했다. 이를 계기로 입양가족 커뮤니티 대표로 활동하다 지금은 입양가족의 사후서비스(교육 및 상담)를 담당하는 ‘건강한입양가정지원센터’ 대표를 맡고 있다.

나도 입양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입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양아동이 원가족과 만나며 교류하는 일, 입양부모와 친부모를 구분하는 일, 또래 아이들과 다른 가족 구성을 인지시키는 일은 험난했다.

무엇보다 입양아동이 자신이 입양된 이유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미루는 때때로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그리워하거나,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낮아지고, 큰 상실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은 철렁였다. 내가 아이에게 소홀해서 그런 건 아닌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짐을 맡은 건 아닌지, 누가 아이의 가슴에 불을 지른 건지 생각하면 괘씸하고 속상하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 나를 달래주었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아이가 이 과정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힘껏 도와주자고.

남편의 위로를 받은 나는 아이와 단 둘이 빈방으로 들어가 꼭 끌어안아 주곤 했다. 아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공감하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아이가 내 품에 안겨 울면서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길 몇 차례.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이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씩씩해졌다.

우리 부부는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어쩌면 평생 감당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도 나약한 인간인지라 언제쯤이면 이 고비가 지나갈 것인지, 이런 상황이 버거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아이들을 만난 후 우리 부부의 삶은 이전보다 풍성해지고 건강해졌다. 우는 날도 많지만 웃는 날이 더 많다. 가족이기 때문에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가족의 달

재취업 주부 이새란 씨의 ‘가족이 일군 기적’

“일과 직장 병행… 고맙고 사랑해”

11년간의 연애, 결혼 3개월 만에 첫 임신, 11주 만에 자연유산, 그리고 두 번째 임신. 그동안 우리 부부에게 일어났던 일들이다. 어린이집 보육교사라는 직업 특성상 나는 임신과 출산 시기를 학사일정에 맞춰야 했다. 앞서 유산을 경험했던 터라 두 번째 임신을 했을 때는 초기부터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런데도 의사는 유산 위험이 있다고 했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8년간의 직장 생활을 정리할 땐 기분이 참 묘했다. 처음엔 과도한 업무와 무한책임에서 벗어났다는 마음에 매우 홀가분했지만, 나만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허탈감에 빠진 내게 남편이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을 온전히 나만을 위해 쓰라며 외국어학원과 컴퓨터학원에 등록할 것을 권했다. 맞벌이에서 외벌이로 바뀐 후 경제적 부담이 큰 상황이었지만 나를 먼저 생각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하지만 집에 있으면서 나만 낙오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임신기간 중 감정적으로 변하는 나를 남편은 다독여주었다. 남편의 든든함이 나의 감정을 잠재웠다. 덕분에 무사히 출산을 했고, 엄마가 됐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위로하지 못했는데, 남편의 응원과 아이가 나의 허무함과 열패감을 덜어냈다. 아이를 키우면서 누리는 소소한 기쁨, 즐거움, 보람은 무척 달콤했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남편의 벌이만으로 가계를 꾸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재취업을 어렵사리 결심했건만 직장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집과 직장, 아이가 다닐 어린이집 위치가 가까워야 하는데, 이런 조건에 적합한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어린이집 원장들이 11개월 된 아기를 둔 30대 초반의 여성을 쉽사리 채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접자들은 근무 중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할 것인지, 둘째 아이는 언제 가질 계획인지, 친정이나 시댁은 인근에 위치하는지, 남편의 직장은 어딘지, 남편이 가사와 육아를 얼마나 돕는지 등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임신과 출산 때문에 생긴 경력 단절도 재취업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고용주들은 8년간의 경력보다 1년 6개월의 공백기를 주목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채용이 불발됐다. 그제야 경력단절여성으로서 겪는 부당함과 서러움이 몰려왔다. 재취업에 실패하면서 자신감이 떨어졌다.

갈팡질팡하기를 며칠 째. 출근한 남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나의 가치를 알아줄 곳이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다시 힘을 얻어 여성새로일하기센터에 취업 상담을 하는 등 다각도로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시댁과 친정 식구들도 내게 취업 준비에 필요한 공부를 하라며 주말에도 아이를 맡아줬다.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아이도 나와 떨어져 있을 땐 보채지 않고 가족들을 잘 따라줬다. 가족들이 나의 재취업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며 헌신해준 것이다. 가족의 응원과 사랑이 기적을 만든 것일까. 나는 올해 국공립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취업에 성공했다.

일과 직장을 병행하는 나는 여전히 좌충우돌한다. 직장에서는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성스럽게 아이들을 돌보지만 정작 퇴근 후에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군말 없이 집안일을 대신 해준다.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아이는 첫돌이 지나자마자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도 다른 아이는 내 손으로 돌보는 데 정작 내 아이는 돌보지 못한다는 자책감이 컸다. 하지만 아이는 순하게 밝게 건강하게 잘 커주고 있다. 누군가 나의 재취업 성공 요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우리 가족이 이룬 기적’이라고.

 

가족의 달

경찰관 아내 홍귀임 씨의 남다른 소망

“국민 위해 봉사하는 남편, 늘 건강 챙기세요”

수갑, 제복, 잠복근무, 민중의 지팡이…. 경찰 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밤을 새며 범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거나 시비가 붙은 이들의 싸움을 중재하는 경찰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늘 위험 속에 사는 경찰을 남편으로 둔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서울 중랑경찰서 여성청소년수사팀장 이상인 경감의 아내 홍귀임 씨는 경찰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맡은 업무에 따라 근무시간이 불규칙한 것은 물론 지방 근무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귀가하는 데다 야근이 잦아요. 푹 쉬지 못해 과로가 누적될 때는 ‘저러다 쓰러지면 어쩌지’ 걱정되죠. 그런데도 남편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가족과 시간을 보내요. 정말 바쁠 땐 새벽에 출근하기 전에 잠자는 아들과 딸의 귀에 대고 ‘아빠 출근한다’고 얘기해요. 그러면 아이들은 잠결에 아빠를 배웅하고(웃음).”

가정에서 시작된 이상인 경감의 다정다감은 밖에서도 이어진다. 청소년 범죄 전문인 그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법원에서 관리하는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만난다. 겉치레 만남이 아니다. 오랫동안 함께하다 보니 이젠 아이들의 학업 성적뿐만 아니라 이성 친구까지 줄줄이 꿴다.

“사회에 보탬이 된다는 점이 남편을 경찰로 살아가게끔 만드는 것 같아요. 탈선 청소년이 마음을 잡고 집에 들어가 가족과 관계가 회복될 때 가장 기쁘대요. 가정이 건강해야 국가가 건강하다는 게 남편의 지론이죠.”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가족에 대한 남편의 사랑이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고 홍 씨는 말한다. 그가 남편에게 바라는 건 한 가지다. “지금처럼 건강하게 지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가족의 달

다문화가정 결혼이주여성 김수연 씨의 ‘고마운 가족’

“다문화가정 상담원 꿈 마침내 이뤘어요”

중국 옌지(延吉)에는 한국인이 많았다. 사업차 중국에 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옌지는 오래전부터 조선족 동포들이 밀집해 살고 있어서 조선족과 한국인이 만나 결혼하는 사례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조선족 김수연 씨도 이곳에서 한국인 남편을 만났다.

인연은 중국에서 맺었지만 결혼 생활은 한국에서 해야 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예상은 했지만 한국은 중국과 많이 달랐다. 한국인은 고기를 튀기지 않고 찌개에 넣어 먹는 걸 좋아했다. 이 정도는 적응할 만했다. 말로만 들었던 지하철을 일상적으로 타야 했고, 창고 같은 대형마트에서 장을 봐야 했다. 설렘보다 두려움이 커졌다. 가족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면서 향수병이 도졌다. 그때 남편과 시어머니가 김 씨를 붙잡아줬다.

“제가 주변 사람들의 말에 마음이 상하기라도 하면 남편이 ‘한국인은 감정적이지만 정(情)이 많다’며 다독여줘요. 시어머니는 외국인인 며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해요. 딸도 학교 친구들에게 엄마가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요.”

중국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김 씨는 한국에 온 후 다문화가정 지도사의 꿈을 키웠다. 다문화가정을 꾸린 자신이 누구보다 결혼이주여성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도 김 씨의 결정을 적극 지지했다. 다문화가정 부부가 겪는 갈등을 도와주는 상담사로 활동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김 씨는 현재 다문화가족의 정착과 이주여성 폭력 피해를 지원하는 다누리콜센터 상담원으로 활동한다.

“저의 결정을 믿고 응원해준 가족 덕분에 이주여성이었던 제가 다문화가정 지도사와 상담원이 됐어요. 저의 경험을 토대로 이주여성들을 돕고 싶습니다.”

 

가족의 달

‘생애 첫 내 집 마련’ 황정미 씨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세상이 선물해준 너무 소중한 보금자리”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나의 소중한 아들과 딸. 엄마가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이네. 2013년은 우리 가족에게 의미 있는 한 해였지. 우여곡절 끝에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됐으니 말이야.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집을 구하느라 무척 고생했던 게 이제는 하나의 추억이 됐어.

비록 작지만 아늑한 집을 마련하게 돼 무척 기뻐. 사실 집을 마련하는 과정은 어려움의 연속이었어. 당신이 직장을 옮기면서 갑자기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 탓에 출근 날짜에 맞춰 급하게 집을 구해야 했으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가진 돈에 맞춰 아이들이 지내기에 알맞은 깔끔하고 깨끗한 집을 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

그런 와중에 친구가 ‘생애최초주택구입자금 대출’을 추천해줬고, 시중은행보다 저렴한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기존 전세금과 그동안 조금씩 저축한 돈에서 부족한 금액은 생애최초주택구입자금 대출로 해결할 수 있었어. 정말 감사한 일이야.

처음으로 ‘내 집’으로 이사하던 날,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던지. 내 집을 마련한 이후 가장 좋은 점은 우리 부부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게 됐다는 거야. 아들과 딸이 앞으로 이곳에서 어린이집과 학교를 다니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웃과 더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덕분에 엄마는 요즘 동네 엄마들과 교류하는 재미에 푹 빠졌단다. 엄마는 우리 가족이 집을 마련한 이후 더 화목하고 건강해진 것만 같아 무척 감사해.

비록 육아와 가사 때문에 잠시 직장을 쉬게 된 건 안타깝고 슬프지만, 너희들이 크는 이 시기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힘을 낼 수 있어. 그리고 이런 선택을 지지하고 격려해준 당신에게 진심으로 고마워. 우리 더 사랑하고 행복하자.

 

가족의 달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 김경미 씨의 가족일기

“오늘도 내일도 가족을 더 사랑해야지”

2015년 봄, 호스피스 병동에 새 환자가 왔다. 서른네 살의 싱글 여성, 암환자였다. 자궁에서 시작된 암은 폐와 뇌로 전이돼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환자는 자신의 상태를 어느 정도 예감하는 듯했다.

어머니에게 딸의 암 선고는 청천벽력이었다. 남편을 잃은 지 2년 만에 딸이 말기암을 진단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딸은 틈이 날 때마다 “내가 죽으면 장례를 이렇게 치러달라”, “내가 하늘나라 가면 엄마를 위해 기도하겠다” 같은 유언을 어머니에게 남겼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이 죽음을 앞둔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부인하고 거부하고 화를 냈다. 그들의 사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딸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툭하면 가족에게 이별을 예고하고, 인사말을 남기는 딸을 받아들였다. 자신도 딸에게 약속을 했다. “네가 가도 나는 여기서 열심히 살겠다”고.

암 병동에서 근무하다 보니 죽음을 앞둔 환자와 가족이 경황없이 작별하는 것을 수없이 보게 된다. 죽음이란 게 예고된다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욱이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야 한다는 건 남은 가족에게 지극히 잔인하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환자와 가족은 달랐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했다.

이 가족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것을 계기로 환자 중심의 진료를 하던 나의 간호 패턴이 조금 달라졌다. 환자 가족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최근 정부가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 제도를 전면 확대 시행하기로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환자와 가족이 내게 가르쳐준 것도 있다. 가족이 함께하는 기쁨이다. 항상 든든하게 가족을 지켜주는 남편과 건강하게 자라는 두 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그래서 아침마다 늘 남편과 아이들을 보며 다짐한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 가족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자”고.

 

· 김건희 (자유기고가) 201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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