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으로 11월 22일 오전 2시 서거했다(향년 88세, 1927~2015).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거산(巨山)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경제, 정치, 군(軍) 등 사회 전 분야의 개혁을 단행하며 한국 현대사의 새 국면을 열었고, 2015년 겨울 역사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늘도 고인을 배웅했다. 하얀 눈발이 흩날리던 26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전직 대통령으로선 처음 국가장으로 치러진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는 유족과 각계 주요 인사 등 1만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이 11월 22일 서거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거산(巨山)이자 경제, 정치, 군에 이르는 사회개혁을 이끌었던 최초의 문민정부 대통령은 역사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전 대통령의 국가장 영결식은 11월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됐다.
황교안 국무총리 겸 장례위원장은 조사를 통해 "김영삼 전 대통령님은 평생 동안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면서 "우리 국민이 사랑한 김영삼 전 대통령님, 이제 생전에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빈다"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영결식 후 운구 행렬은 김 전 대통령이 46년간 살아온 상도동 자택과 김영삼기념도서관을 지나 장지인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동했고, 김 전 대통령은 현충원 장군 제3묘역에 안장됐다.

▷ 박근혜 대통령이 11월 23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이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은 23일 오후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방문해 애도의 뜻을 밝혔다. 박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 등 7박 10일간의 다자회의 순방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이날 오후 2시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박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했고,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의 손을 잡고 깊은 애도와 추모의 뜻을 밝혔다. 박 대통령은 26일 영결식 당일 오전에도 빈소를 찾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이명박 전 대통령,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등 여야를 막론한 정계 인사들도 조문했다. 김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감사원장, 국무총리에 임명해 대선주자로 키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빈소를 찾아 방명록에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 적고 "물을 마시면 물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라는 말씀대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기여하신 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최다선 기록
'3당 합당'으로 대통령 당선
1927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거제에서 출마해 역대 최연소(만 25세)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이승만 정권의 3선 개헌에 항의해 탈당한 뒤 1990년 3당 합당 때까지 36년간 야당 생활을 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면서고향 거제를 떠나 부산으로 정치 무대를 옮기게 된다. 김 전 대통령은 총 아홉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부산에서만 일곱 차례 당선됐다. 최다선(最多選) 기록이다. 그의 호 '거산(巨山)'은 출생지인 거제와 자신을 정치인으로 키워준 부산을 뜻한다.

▷ (왼쪽)1983년 5월 5공 독재에 항거해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였다. (오른쪽)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 6·26 대행진에 참석하려다 경찰 버스에 실려 가고 있다.
1974년 47세 나이에 야당인 신민당 총재가 된 김 전 대통령은 '선명야당'을 기치로 내세웠다. 야당을 이끌며 고난의 정치 인생을 겪어야 했던 그는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1983년 5월 가택연금된 뒤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는 민주화 투쟁의 기폭제가 됐고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1988년 10월 당시 세 야당 총재가 손을 맞잡고 연내 5공 청산을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영삼(민주), 김종필(공화), 김대중(평민) 당시 총재.
1990년에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이끌었던 여당 민주정의당과 합당했다.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이른바 '3당 합당'을 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고 설명했지만 '정치적 기회주의'로 비난받기도 했다. 3당은 민주자유당이라는 새로운 여당으로 거듭났고, 여당 후보로 출마한 그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42%의 지지를 얻어 김대중, 정주영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문민정부(文民政府)가 탄생한 순간이다.

▷1990년 2월 ‘3당 합당’을 주도해 민주자유당 현판식을 했다.
금융실명제·역사 바로 세우기 등
경제·정치·군 개혁
1993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 김 전 대통령은 '신한국 창조'라는 국정 지표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군에 이르는 광범위한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신한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눈물과 땀이 필요하다. 고통이 따른다. 우리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자"고 외쳤다.

▷ 1993년 2월 25일 국회 앞 광장에서 열린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취임 당일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개방하고, 이틀 뒤엔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 17억7822만 원을 공개했다. 이는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로 확대 추진됐다. 취임 직후 군 인사를 단행해 12·12사태를 주도한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했다. 그해 8월에는 부패 척결을 위해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했다. 이후 부동산 거래 실명제, 지방자치 선거 실시 등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며 취임 초기 90%가 넘는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1995년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 아래 5·18 특별법을 제정하고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사를 통해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일제 조선총독부 청사를 해체하고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반환의 물꼬를 튼 것도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이었다.

▷ 1996년 4월 16일 당시 김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제주 신라호텔 정원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세계화'는 김 전 대통령의 또 다른 주요 정책 전략이었다. 1996년 12월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이 대표적인 업적이다.
무수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권 후반기 남긴 오점도 있었다. 1996년 12월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7분 만에 통과시켰다가 대대적인 반정부 국민항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두 법은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크게 저해하는 악법으로 평가받았다.
1997년 한보그룹 부도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가 한보 특혜융자의 배후인물로 국정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현철 씨는 구속됐고, 김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식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고 재임기간을 술회했다.

▷ 60세이던 1987년 10월 통일민주당 총재 시절 연설 장면.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대통령"
고인 마지막 당부는 '화합과 통합'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산증인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에 외신도 관련 소식을 긴급히 타전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는 서거 소식을 속보로 전하면서 "김 전 대통령이 한국에서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으며, 금융실명제와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등을 처음 도입하는 등 반부패 개혁을 주도했다"고 소개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군부독재 아래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1993년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에서 문민정권을 부활시켰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김 전 대통령이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면서도 정치적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에 이르지 못해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패했으며, 비판도 받았다"며 대한민국 정치 역사를 상세하게 소개했다.
CNN은 "김 전 대통령이 온건 성향의 야당 지도자이자 민주화 운동의 대변자였다"고 평했으며, AFP통신도 고인이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대통령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의 당선으로 30년 이상 이어진 군부독재가 막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 재임 당시 현직이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는 "민주화 운동을 하고 대통령이 된 분이어서 그 시대 한국에서 가장 필요하고 어울리는 대통령이었다"면서 "마음으로부터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재임기간 김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미국과 한국 사이의 동반자 관계를 심화하고 지역 안보와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김 전 대통령과 협력했던 것이 자랑스럽다"고 국내 언론에 성명을 보냈다.
한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생전인 2011년 전 재산의 사회 환원을 약속했다. 경남 거제도 땅 등 52억 원을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에 기부했고,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은 부인 손명순 여사 사후에 소유권을 센터에 기부하기로 했다. 문정수 전 부산시장은 "김 전 대통령은 평소 '정치인이 부를 가지는 것은 부덕한 일이다'라고 말했고 이를 몸소 실천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 1996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쓴 신년 휘호를 보고 있다. ‘올바른 길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뜻으로 김 전 대통령의 좌우명이었다.
고인의 생전 좌우명은 대도무문(大道無門 : 올바른 길에는 거칠 것이 없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당부는 '통합과 화합'이다.
글 · 조영실(위클리 공감 기자)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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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