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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해군 첩보부대 · 켈로부대 목숨 건 인천상륙작전 활약

우리 영화계에서 인문학 열기를 타고 역사적 사건을 심층적으로 다룬 영화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만하다. ‘광해, 왕이 된 남자’, ‘암살’ 등은 역사를 소재로 해서 큰 인기를 모은 작품이다.

최근 상영되고 있는 영화 ‘인천상륙작전’도 우리의 역사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정확한 역사적 고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아쉽기도 하다. 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나 ‘더 퍼시픽’은 깐깐한 역사 고증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제2차 세계대전의 느낌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아직 우리 영화가 이런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더욱 감동적인 영화를 만들어내기를 바라면서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 초기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전환점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인천상륙작전이 완전한 기습작전이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둘째, 인천상륙작전은 이미 북한 군부가 예견했으나 낙동강 돌파와 경인지구 사수라는 두 가지 선택에서 북한 지도부가 낙동강 돌파를 우선했기 때문에 기습이 아닌 상륙작전이었고, 이는 북한의 전술상의 실책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다만 현재까지 공개된 사료들에 의하면 두 번째 주장인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사전 인지에 대해서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인천상륙작전은 적의 작전을 교란하고 대규모 병력을 적 후방에 상륙시켜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킨 ‘성공한 상륙작전’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전세 뒤집은 성공한 상륙작전
예비 작전인 엑스레이 작전 성공이 발판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평가가 단순히 기습이었는지 아닌지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천상륙작전이 6•25전쟁에서 차지하는 부분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의의는 유엔군이 우회 기동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했으며, 이 덕분에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를 얻게 됐다는 점이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시설을 북진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인천상륙작전은 고뇌에 찬 맥아더의 개인적 결단으로 결행됐으며, 수세에 몰려 있던 유엔군이 전세를 완전히 뒤집은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흔히 전쟁사를 통해 볼 때 특수작전(Special Operation)이나 비밀작전(Covert Action)은 그 전사적 의미를 정확하게 규정하기 쉽지 않다. 특수작전과 비밀작전은 말 그대로 비밀리에 이뤄지는 것으로 그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고, 관련 문서도 매우 제한적으로 공개되는 탓에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동안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인천상륙작전의 예비 작전인 엑스레이 작전(X-Ray Operation)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화에서 소개된 엑스레이 작전이 바로 그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맥아더는 1950년 8월 12일 대한민국 해군 고문관이던 마이클 루시 중령을 손원일 해군 총참모장에게 보내 인천지역의 북한군 배치 현황, 보급선과 보급 현황, 해로의 기뢰 매설 여부, 상륙 지점의 지형, 인천항의 안벽 높이, 밀물과 썰물 때의 해안 길이, 북한군의 방어진지 상황 등을 탐지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6?25전쟁 당시 한국 해군은 그 규모와 인원 면에서 매우 열악했지만, 남해안과 서해안에서 소규모 작전을 감행하고 있었다.

손원일 총참모장은 해군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을 불러 첩보 수집 임무를 하달했다. 한편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려면 인천 근해의 영흥도와 덕적도 등 주변 섬들을 먼저 탈환해야 했다. 이를 위해 손원일 총장은 PC-702함장인 이희정 중령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이희정 중령은 110명의 육전대를 편성해 8월 18일엔 덕적도 상륙작전을, 8월 20일에는 영흥도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이 가운데 덕적도에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영흥도에서는 북한군의 저항을 받아 5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8월 10일 현재까지 55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인천 상륙작전’에서는 리엄 니슨이 맥아더 장군을 연기했다. ⓒ동아DB

▶ 8월 10일 현재까지 55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인천 상륙작전’에서는 리엄 니슨이 맥아더 장군을 연기했다. ⓒ동아DB

 

이 작전의 성공에 뒤이어 함명수 소령이 이끄는 첩보부대가 영흥도에 상륙해 활동을 개시했다. 함명수 소령은 손원일 해군 총참모장의 특별 지시를 받고 8월 17일 부산에서 백구호를 타고 극비리에 부산항을 출발했다. 이후 켈로(KLO)부대와 함께 영흥도 남단 십리포 해안에 도착해 인천지역 북한군 배치 현황, 보급선과 보급 현황, 해로의 기뢰 매설 여부, 상륙 지점 지형, 인천항의 안벽 높이, 북한군의 방어진지 등 인천과 월미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 일대의 적정을 수집했다.

3개 팀으로 구성된 해군 첩보대는 영흥도를 본부로 통신, 경비, 정보 분석을 담당하는 1개 팀과 인천 침투를 임무로 하는 2개 팀으로 나뉘어 활동했다. 첩보대는 사람을 활용해 직접 가서 보고 듣는 위험한 첩보 활동이 주 임무였다. 이들은 대원들을 위장시켜 월미도 해안도로로 파견해 해안포대의 위치와 규모, 해안 암벽의 높이 등을 측정하기도 했다. 첩보대원들은 인천뿐만 아니라 수원, 서울 근교까지 드나들며 정보 수집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첩보대의 활약으로 9월 15일 0시 불 켜진 팔미도 등대
무명 한국 청년단원들의 활약도 잊지 말아야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이후 팔미도 등대를 밝히기 위해 영흥도로 상륙한 극동군사령부 첩보부대인 클라크 첩보대에 전달됐다. 클라크 첩보대는 9월 1일 덕적도 근해에 도착한 후 한국 해군의 PC-703호로 옮겨 타고 영흥도에 상륙했다.

1950년 9월 15일 이뤄진 인천상륙작전 모습. ⓒ동아DB▶1950년 9월 15일 이뤄진 인천상륙작전 모습. ⓒ동아DB

 

클라크 첩보대는 9월 10일 배를 타고 팔미도의 등대를 정찰했다. 팔미도에 상륙해 무인 등대를 점검한 클라크 첩보대는 등대를 사용하는 데는 이상이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이를 도쿄에 타전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9월 15일 0시에 팔미도 등댓불을 밝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 14일이 되자 클라크 첩보대는 명령대로 팔미도에 상륙해 지정된 시간에 등댓불을 밝혔고, 이를 발판으로 9월 15일 유엔군의 함대가 비어수로를 통해 상륙작전을 개시해 성공하였다.

이처럼 대규모의 인천상륙작전 배후에는 작전의 성공을 위해 특수작전을 수행한 한국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KLO)부대의 활약이 있었다. 또한 해군 첩보부대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영흥도에서 활약한 무명의 한국 청년단원들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의 정확한 수와 인명은 확인되지 않지만, 이들이야말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무명용사들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동원된 약 7만5000명의 상륙 병력 가운데 상륙작전 당일 피해는 불과 17명의 사상자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동원된 연합군 약 133만 명 가운데 상륙 당일에만 1만여 명의 연합군이 희생된 데 비하면 인천상륙작전은 엄청난 성공이었다.

 

이상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글 · 이상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20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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