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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피로 지킨 6·25전쟁 호국 격전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돼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장장 1129일 동안 한반도 곳곳에서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과 유엔군은 나라와 평화 수호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전투에 임하며 많은 피를 흘렸다. 적군을 물리쳐 승전보를 올리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들에 의해 격퇴당하기도 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된 지난한 시간이었다. 그 가운데 6•25전쟁 중 벌어진, 잊혀서는 안 될 전쟁사적 의미 있는 전투를 소개한다.

 

지난한 6•25전쟁 중 첫 승전보 올리다
감우재 전투

1950년 7월 4일부터 10일까지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일대에서 감우재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북한군 제15사단을 막기 위해 장호원에서 음성군으로 이동해 방어막을 구축했다. 7월 5일 국군은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부근에서 북한군을 포위해 무찔렀으며, 이 여세를 몰아 6일과 7일 금왕읍 무극리에 있던 북한군을 공격해 이 지역을 되찾았고, 생극면 병암리까지 진출했다.

북한군도 이내 반격에 나섰다. 이에 우리 군은 무극리 남쪽 백야리에 방어진지를 구축해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다음 날인 8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에 백야리 방어진지를 넘겨주고 원남면 보천리 쪽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북한군은 이 틈을 타 남쪽으로 내려와 총공세를 퍼부었지만, 국군 제11연대는 감우재에서 북한군 3개 중대를 물리쳤다. 또 다음 날 북한군이 다시 공격해왔지만, 제11연대 제2대대는 이 지역에서 북한군을 모두 격퇴했다.

감우재에서 벌어진 4차례의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 2700여 명을 사살하고 17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각종 박격포와 차량, 기관총 등의 전투 장비를 빼앗았다. 국군이 6•25전쟁 중 첫 승전보를 올린 전투였다. 이 승리로 우리 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켰고,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시간적인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감우재 전승기념관

▶ 야외에 설치된 전승기념비.

 

| 감우재 전승기념관 | 6•25전쟁 중 최초의 대승전인 감우재(음성지구)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무극전적국민관광지 내에 세워졌다. 전투 관련 자료와 6•25전쟁 당시의 전투장비 등 약 200점의 전시물을 수집•전시하고 있다. 충북 음성군 음성읍 생음대로 594 / 043-871-5930

 

미군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
장진호 전투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은 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는 장진호에 미 해병대를 주둔시킨다. 당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곧 승리할 거라 생각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급변했다. 유엔군이 추측한 중공군 참전 규모는 3만 명 안팎이었지만, 실제로 투입된 중공군의 숫자는 무려 30만 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선제공격에 들어갔으며, 동부지역을 담당한 미 제10군단 알몬드 소장은 북쪽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1950년 11월 1일 국군 제1군단을 전선의 오른쪽,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왼쪽에 배치해 국경선으로 치고올라갈 계획이었다.

전투는 11월 27일 중공군이 미 해병대를 공격하며 시작됐다. 미 해병대는 사령부로부터 병력을 증원받았음에도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전투가 벌어진 장진호는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추운 곳이어서, 무기와 차량이 모두 얼어붙었고 부상자를 위한 수혈관이나 모르핀조차 얼어붙어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미 제10군단장은 11월 30일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어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 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유담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의 제5연대와 제7연대가 각각 중공군을 격파해 12월 4일 하갈우리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 고립된 미 제7사단은 구출이 지연되자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하갈우리로 이동했다.

이에 중공군 제58사단이 주축이 되어 하갈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공군 제60사단은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해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7일 고토리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해 장진호 전투를 마무리했다.

 

 흥남부두

▶ 치열했던 접전지였던 흥남부두의 당시 모습.

 

중공군은 장진호 부근 전투에서 전투 손실뿐 아니라 그 외의 손실도 상당했고, 이에 따라 더 이상 군사작전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중공군 제9병단 지휘부는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 덕분에 미 제1해병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 명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난민 등 20만 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흥남 철수 이야기는 영화 ‘국제시장’ 도입부에 일부 그려진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 

▶ 미 해병대 박물관 내 공원에 설치될 장진호 전투 기념비.

 

| 장진호 전투 기념비 |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의 해병대 박물관 내 공원에 세워질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오는 9월 준공 예정이다.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던 함경남도 장진군 고토리 지역을 기념해 ‘고토리의 별’ 장식이 달린다.

 

전 국민의 힘으로 지켜낸 방어선
낙동강 방어선 전투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국군, 경찰, 유엔군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전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승리를 이끌어낸 전투다. 우선 ‘낙동강 방어선’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마산, 왜관, 포항 일대로 이어지는 낙동강 방어선은 유엔군의 보급기지인 부산에서 마산, 대구, 영천, 포항 등 전방지역에 이르는 방사형의 병참선이 구축돼 전쟁물자 보급과 병력 이동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또한 기동 예비대를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자유자재로 투입해 효과적인 역습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이렇듯 중요한 지역이었으니, 국군과 유엔군은 이 방어선을 반드시 지켜내야 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1개월이 지난 7월 말 북한군은 영덕, 안동, 상주, 진주를 잇는 선까지 진출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8월 초 낙동강까지 물러서서 ‘부산 교두보’라고 불리는 동남부 일원으로 방어선을 축소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3일까지 왜관의 낙동강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 8월 4일 새벽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를 완료했다. 국군은 왜관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 북쪽을 맡고,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진해만에 이르는 서쪽을 맡아 긴밀한 공조와 협조체제를 유지했다.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북한군은 8월 초까지 1개 전차사단과 9개 보병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으며, 또 다른 3개의 보병사단을 뒤따라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 이에 군국과 경찰, 유엔군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전투에 동참해 이 지역을 지켜냈다. 학생들은 학도병이나 학도의용군으로, 여건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전쟁 노무자로 전투에 참여했다.

8월 16일 미 공군의 B-29 폭격기에 의한 대규모 폭탄 투하로 왜관 전면에 포진해 있던 북한군 주둔지역을 완전히 초토화했고, 영천 지역 전투에서는 국군이 북한군 15사단을 전멸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다부동 전적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조형물.

 

| 다부동 전적기념관 |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다. 전시관과 기념비, 야외전시장, 관리사무소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경북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1486 / 054-973-6313

 

영화 ‘고지전’에서 그린 유례 없이 치열한 전투
백마고지 전투

평강, 철원, 김화를 잇는 지역 일대를 ‘철의 삼각지대’라 부른다. 당시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이 “적이 전선의 생명선으로 사수하려는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한 데서 명칭이 유래했다. 이 지역은 넓은 평야가 발달했고 한반도 중앙에 위치해 교통과 군사전략의 요충지였는데, 6•25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은 이곳을 남침의 본거지로 삼았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11개 군단, 26개 사단을 투입했다. 특히 휴전협정 체결이 임박할수록 방어선을 유리하게 구축하고 협상에서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중 하나가 백마고지 전투다. 이는 1952년 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로, 지역 전투로서는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기록된다. 영화 ‘고지전’은 바로 이 전투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초 휴전회담 중 발생했다. 포로 문제에 대한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철원군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중공군 제38군은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국군의 후방에 있는 역곡천을 범람시켜 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적군의 공격은 집요했다.

백마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12차례 쟁탈전을 반복했다. 7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먼저, 국군 제9사단은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승리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5차례나 벌어졌고 그사이 국군 역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10월 11일 밤 고지가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지만 수차례 뺏고 뺏기는 전투가 계속됐다. 마침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전초진지를 탈환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했는데, 그중 1만여 명이 전사 또는 부상하고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됐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됐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었다.

 

 백마고지 위령비

▶ 백마고지 전적지 내 설치된 백마고지 위령비.

 

| 백마고지 전적지 |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기념의 장, 회고의 장, 다짐의 장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처절했던 격전 현장을 재현했고, 기념탑을 세웠다. 강원 철원군 대마리 50-11 / 033-450-5558  

 

유엔군 6·25전쟁 주요 격전지

지평리 전투

유엔군은 1•4 후퇴 이후 평택, 원주, 삼척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고, 중공군과 유엔군이 다시 맞서게 되면서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가 시작됐다. 당시 중공군은 수원, 이천, 원주, 강릉까지 진격해 있었고, 전투는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 삼마치 고개와 지평리에서 벌어졌다. 삼마치 고개에 진출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격에 물러났고, 2월 초 우측방을 대비하기 위해 지평리에는 미군 제23연대만이 그곳을 지키게 됐다. 유엔군 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은 진지를 축소해 마을을 중심으로 1.6㎞의 방어선을 선정해 원형진지를 구축했다. 북쪽에 1대대, 동쪽에 3대대, 남쪽에 2대대를 배치한 뒤 서쪽에 몽클라르 중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대대를 배치했다.

 

 지평리 전투 기념관

▶ 지평리 전투 기념관에 설치된 유엔(프랑스)군 참전충혼비.

 

2월 13일 저녁, 중공군이 8차례에 걸쳐 공격을 해왔으나 제23연대는 부상병 후송까지 거부하며 목숨을 걸고 중공군을 격파했다. 다음 날, 미군과 프랑스군은 지평리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처절한 저항과 교전으로 방어진지를 지켜냈지만, 이미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미군 제9군단의 예비인 크롬베즈 5기병연대를 중심으로 특별임무부대가 투입돼 이들을 성공적으로 구출했고, 중공군은 첫 패배를 인정하며 철수했다.

 

설마리 전투

1951년 4월 21일 영국군은 중공군 정찰대가 임진강을 건너는 것을 발견해 4명을 사살했다. 이것이 설마리 전투의 시초였다.

다음 날부터 영국군과 중공군의 전투가 전개됐다. 중공군이 월등히 많은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글로스터 대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조명탄을 지원받아가며 광범위한 반격을 가했다. 글로스터 대대는 6시간 동안 방어했지만, 중대장인 엥기어 소령과 지휘관 모두가 전사하고 A중대의 장교 1명과 사병 53명, D중대의 중대원 12명만이 살아남아 235고지로 철수하게 됐다.

 

 설마리 전투 기념비(위)와 참혹한 전투를 벌였던 글로스터 대대(아래).

▶ 설마리 전투 기념비(위)와 참혹한 전투를 벌였던 글로스터 대대(아래).

 

23일, 글로스터 대대는 재편성된 부대로 이동해 부상병 40명을 후송했고 중대의 인원을 늘렸지만, 중공군은 퇴로를 차단하고 재공격에 나서 B중대는 완전히 포위됐다. 이 상황에서 20여 명의 중대원이 탈출했지만 나머지 병사는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참혹한 전투가 계속되자 제29여단의 부로디 준장은 25일 철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글로스터 대대는 무전기가 방전돼 26일 오전 6시가 돼서야 철수 명령을 전달받았다. 명령에 따라 후퇴를 했지만 이미 포위당한 상태여서 많은 인원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가평지구 전투

서울이 다시 적군의 손에 넘어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가평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뉴질랜드와 캐나다, 호주 등으로 구성된 유엔군 제27여단이 투입됐다. 부대 배치가 끝난 뒤인 4월 23일,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해 내려오던 중공군과 유엔군의 전투가 가평에서 벌어졌다. 왕립호주연대 제3대대는 중공군에 기습 공격을 가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역습을 받았지만 방어전투를 통해 고지를 확보했다.

 

 가평지구 전투전적비

▶ 가평지구 전투전적비.

 

전투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다음 날 아침 유엔군은 항공 폭격과 포병 사격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이에 중공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를 놓칠세라 즉시 추격작전을 펼친 유엔군 수색대는 중공군 4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호주에서는 아직도 ‘가평’이란 단어가 희생과 영광의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호주에서는 4월에 ‘가평의 날(Gapyeong Day)’을 지정해 현역 군인들의 큰 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 두경아 (위클리 공감 객원기자)
참고자료 · 국가보훈처 블로그 ‘훈터(mpva.tistory.com)’ 201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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