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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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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만의 소중한 가족 여행 우리는 그때 거기 있었다

2014년 9월, 아버지 퇴직을 맞아 오랜만에 가족끼리 여행을 하기로 했다. 마음은 먹었지만 곧바로 언제 갈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는 속담처럼, 여행도 해본 사람이 계획을 잘 짠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별수 없이 국내 여행과 관련된 웹사이트에 방문한 나는 온종일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여기가 좋다가도 조금 뒤 저기에 마음을 뺏기는 일이 반복되었다. 서울에서부터 제주도까지, 도(道)를 넘고 바다를 건너 여행에 대한 환상만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진통 끝에 강화도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가족끼리 여행이 21년 만이라 다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마지막 여행은 1993년 대전엑스포 여행이었다. 끼니는 다 사 먹겠다고 합의가 이뤄졌음에도 엄마는 밑반찬을 한가득 싸가지고 오셨다. 형과 나는 배를 쥐고 웃었다. "하다못해 고기를 구워 먹더라도 밑반찬은 있어야 돼." 강경한 그 모습이 너무나 엄마 같았다. 어디서든 부지런하게 무엇을 만들어내고야 마는 게 딱 엄마였다. "짱구는 말려도 엄마는 못 말린다니까!" 내 말에 가족 모두가 환히 웃었다.

강화도에 가는 날엔 날씨가 좋았다. 멀지 않은 길을 가는데도 우리는 사이사이 차를 세워놓고 휴식을 취했다. 모처럼 누리는 여유였다. 차에서 내린 아빠는 뒷짐을 지고 터벅터벅 어디론가 걸었다. "이게 무슨 꽃인 줄 아니?" 아빠가 물으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구절초고 저기 보이는 건 조개풀이야." 유년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던 아빠는 모르는 꽃이 없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 뒤를 돌아보니 엄마와 형이 우리를 지켜보며 깔깔 웃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아빠를 닮았네!" 나도 모르게 뒷짐을 지고 걷고 있었던 것이다.

강화도에 도착하니 바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리 가족은 바닷가를 거닐며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나오니까 좋다. 그게 어디든." 엄마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지 않니? 이 시간이면 저렇게 해가 지고 내일 아침엔 또다시 해가 떠오른다는 게. 그런데 살면서 해가 뜨고 지는 걸 보는 날들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아빠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앞만 보며 달려오신 두 분의 삶이 바닷물 위에 하늘하늘 그려졌다. 네 식구가 한데 모여 수평선 위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얼마나 될까 생각하니 이 순간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꼭 1993년 같다!" 숙소로 향하던 길에 내가 소리 높여 외쳤다. 21년 전과 달라진 건 단 하나, 운전대를 잡은 게 아빠의 손이 아니라 형의 손이었다는 점뿐이었다. 엄마는 엄마였고 아빠는 아빠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부드럽기만 했던 피부 곳곳엔 주름이 졌지만, 여전히 엄마는 억척스러웠고 아빠는 서글서글했다. 우리가 우리임을 재확인하는 매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여전하다는 것, 아직 함께 있다는 것, 나란히 앉아 한곳을 바라볼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여행이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우리가 그때 거기 있었다는 사실, 그때 거기에서도 여전히 우리였다는 사실을 나는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은 모여 세월이 되고, 세월은 쉬지 않고 흘러 우리는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우리가 언젠가 바닷가에 놀러 갔었다는 사실만 겨우 남겠지만, 우리는 그때 거기 있었다.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오은 (시인) 20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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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들에게 해준 말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해라"

아들이 지난 대학 입시에서 단번에 합격했다. 그가 대견한 이유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스스로 대학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학과를 결정한 일이다. 지금은 사회성과 자존감이 뛰어난 아들로 성장했지만, 중학교 1학년 때만 해도 A, B, C 정도밖에 몰라 부모 속을 태웠던 아들은 당시 초등학교 1학년생과 학원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아들이 영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건 바둑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바둑을 시작해 3학년 때 1단, 4학년 땐 3단, 5학년 땐 4단을 획득했다. 지역 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도 쉽게 했다. 그래서 6학년 때는 유창혁 프로가 지도하는 도장에 다녔다. 처음엔 중급반에 다니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해 프로의 꿈을 키워갔다. 그러나 2학기부터 아들의 태도는 조금씩 이상해졌다. 집에서조차 말수가 현저히 줄었고, 가끔 학원을 빼먹기도 했다. 친구들과 PC방을 전전하며 겉돌았다.

아들의 속마음을 들어봤다. 처음엔 친구들에게 매일 이겨 기분이 좋았지만 고급반에 들어가니 초등 2, 3학년에게도 매일 지더라고 실토했다. 이른바 바둑 천재들에게 매번 졌던 것이다. 괜찮다고 달래면서 "바둑을 오래 뒀으니 좀 싫증 나지? 이젠 네가 좋아하는 다른 걸 해봐"라고 격려해줬다.

아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갖게 된 새로운 취미는 사진이다. 자주 아빠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에 관한 주위 인프라가 뛰어났다. 아빠는 대학시절 사진반 회장도 지낸 아마추어 작가이고, 큰이모네는 베이비 사진관을 한다. 셋째 이모는 베이비 사진관에서 매니저로 일한다.

아들은 궁금한 점을 이모들에게 묻고 설명을 들으면서 많은 노하우를 익혔다. 고3 되던 1월엔 3개월 동안 큰이모네 사진관에서 '알바'를 하면서 다양한 실전 기술까지 터득했다. 그러면서도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듯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영어는 중간 정도 성적을 유지했다.

무엇보다 아들에게 다양한 인성을 형성케 해준 게 아버지로서 자랑하고픈 부분이다. 아들은 여섯 살 때부터 지난해까지 14년간 아빠와 무인도에 32번 다녀왔다. 아빠가 매년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행사를 하는 데 따라다닌 것이다. 전기도 없고, 사람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 물과 소금 만들기, 뗏목 만들기, 어살로 고기 잡기, 소라와 보말고둥 줍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험했고, 수많은 다른 가족과 아이들을 만나면서 소통하고, 교감하고, 배려하고, 함께 지내는 법을 익혔다. 아들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아빠와 200번 이상 전국 여행도 다녔다. 아빠가 가족 답사 모임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필자는 이 시대의 아웃사이더였다. 남들이 자녀에게 많은 사교육을 시킬 때 두 아이와 전국을 놀러 다녔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게 했다. '공부해라', '열심히 해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해라'가 전부였다. 이러한 우리 집만의 가풍 덕에 늘 아이들과의 소통이 매일 1, 2시간씩 쉽게 이뤄졌다. 이처럼 구성원 사이에 소통이 이뤄져야 진정한 가족일 것이다.

부모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자식 농사라고 한다. 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며 키웠더니 자기주도적 인생법을 익히면서 문제없이 잘 성장했다. 자신이 선택했기에 만족과 효율이 높고, 따라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을 듯하다. 양육의 지향점이 세칭 일류대를 지향하기보다 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인성이 형성된 아이'로 키워낸 것이야말로 나와 내 가족의 삶에서 잊지 못할 순간일 것이다.

 

· 권오진 (아빠학교 교장, <놀이만 한 공부는 없다> 저자) 20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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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셋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죽음

나도 이제 내후년이면 환갑이다. 내 나이 또래가 모이면 나오는 이야기는 대체로 세 가지로 모아진다. 부모의 건강과 자신의 건강, 그리고 자식 자랑(또는 걱정)이다. 내 세대는 자신이 이미 세상에서 밀려나고 있음에도 아직 자신보다 부모님 걱정을 더 하는 편이다.

2008년 12월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몇 달 뒤부터 홀로 되신 어머님을 모시게 된 다음부터 내게는 어머님 생각이 우선이다. 어머님은 치아가 좋지 않아 고기 같은 것을 씹지 못하고 퇴행성 관절로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 못하신다. 칼질을 못하니 음식을 직접 끓이지도 못하신다. 처음에는 치매 초기 증상마저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일에 바쁜 돌싱의 아들이 모시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들의 죽음을 떠올렸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20년 동안 노무자로 일하신 할아버지는 오 형제 중 셋째셨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를 따라가셨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집에 혼자 계시는 것도 힘들어서 홀로 귀국해버리셨다. 그 사이에 할아버지는 작은할머니를 얻어 아들과 딸 둘을 낳아 기르셨다.

졸지에 과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된 할머니는 홀로 시어머님을 정성을 다해 모셨다. 증조할머니 또한 증조할아버지가 만주에서 귀국하지 못한 탓에 과부 신세였다. 동병상련의 처지여서인지 두 분은 정말 자매처럼 잘 지내셨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씨족마을에 살았다. 증조할머니가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시니 제사나 잔치가 있으면 가장 먼저 증조할머니에게 음식을 보냈다. 나는 뛰어놀다 배가 고프면 증조할머니에게 달려가곤 했는데 증조할머니는 늘 감춰두었던 음식을 내주시곤 했다. 새벽에 주워둔 홍시를 주셨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바로 옆집이 막내 할아버님 댁이었는데 그 댁 할머니가 수많은 손자 중에 왜 '호야'만 그렇게 아끼느냐고 큰소리를 내곤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가난하게 살던 시절에 일어난 아주 사소한 투정이다. 어린 나는 잘못이나 한 것 같아 잔뜩 주눅이 들었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 점심을 잘 드시고는 "나는 한숨 잘란다" 하시며 낮잠을 주무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때 연세가 아흔이셨다. 나는 너무 슬퍼 눈물이 그치지 않았는데 집안 분위기는 초상집이 아니라 잔칫집이었다. 꽹과리만 치지 않았지 문상객의 얼굴에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누군가가 먹으라고 준 떡을 뿌리치고 멀리 달아났다. 이후 성인이 될 때까지 나는 떡을 먹지 않았다. 떡만 보면 증조할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할머니도 아흔이 될 때까지 반쯤은 굽은 허리로 힘들게 걸으셨지만 부엌일을 놓지 않으셨다. 그러다 재래식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져 몇 달 누워 지내다 돌아가셨다. 그 일 때문에 어머님이 무척 고생하셨다. 작은할머니는 아흔셋에 아침까지 잘 드시고 점심때쯤 조용히 운명하셨다.

요즘도 어머님은 할머니 생각이 나시는지 안방에서 부엌에 나올 때면 양말과 덧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서야 걸음을 떼신다. 어머님은 올해 여든 셋이시다. 나는 어머님이 집안의 내력대로 적어도 아흔을 넘기고 증조할머니처럼 편안하게 눈을 감으시길 기대한다. 그래서 늘 모성을 자극하며 자주 움직이시도록 만든다. 싫다, 힘들다 하시면서도 아들을 생각해서인지 어머님도 불평 없이 내 말을 잘 따르신다.

 

· 한기호 (출판평론가) 20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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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빈자리 자꾸 생각나는 이유

올해는 꽃들도 계절을 앞서간다. 늘 어린이날 전후에 피던 튤립 꽃이 4월 초순부터 피기 시작하더니 5월의 마님처럼 품격을 뿜었던 모란은 5월이 되기 전에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절기도 식물도 사람들의 조급함을 닮아가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남편은 손녀딸들을 위해 귀여운 동물 인형을 사다놓았다. 지난해 어린이날 선물을 사려고 장난감 백화점에서 주차하느라 비지땀을 흘리던 기억이 나서 한갓지게 미리 준비해놓았는데 아가들이 좋다고 안고 업고 다닌다.

친정아버지는 명절이나 생일 날 가족들이 모이면 늘 머릿수를 세곤 하셨다. 모두 다 모였다 싶으면 슬며시 안방으로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곤 하셨다. 안도의 한숨이셨을까. 누구 하나라도 도착을 하지 않으면 문을 들락날락 안절부절못하시다가 이제 다 왔다 싶으면 중심을 피해 들어가셨다. 분명히 집안의 가장인데도 모두 다 모여 시끄러이 대화가 오가도 대화를 주도하거나 끼어들지 않으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런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편안하게 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 자리에 늘 존재한다. 식구의 머릿수는 체크하지만 그 외에는 자유를 주는 가족의 우두머리. 속사정은 하나하나 알 것 없고 다 모인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나는 그 비슷한 장면을 영화 <국제시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았다. 가족들이 다 모이고 중구난방 시끌벅적거리자 그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온 덕수(황정민 분)가 아버지 사진을 보며 고백하는 장면이다.

아버지는 가족들과 여행을 갔을 때도 호텔이나 여관에 묵으면 가장 늦게 방을 나오셨다. 방마다 목욕탕마다 세면대나 서랍과 옷장을 훑어보고 혹시 머리핀이라도 두고 오지 않았나, 손수건이나 양말짝이라도 흘리지 않았나를 점검하셨다. 가족의 뒤에서 잃어버리거나 흘린 물건을 챙겨주는 역할. 가족의 물건이라면 그게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표시가 아닐까? 엄마(고 박완서 소설가)는 상하이에 여행 갔다 오시면서 호텔방에 캐시미어 스웨터를 놓고 오신 적이 있다. 아빠가 계셨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며 두고두고 안타까워하셨다.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거나 사회적으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책임을 다하셨다. 사랑의 책임을.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틈에 나도 윗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족의 머릿수를 세고 채우는 게 가장 어렵다는 걸 느낀다. 회사일이 바빠서, 몸살 기운이 있어서, 길이 막혀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발생한다. 가족이 모이는 일보다 더 우선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에겐 잠깐이라도 서로 얼굴을 보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머릿수를 늘리는 것이 가족의 책무이기도 하다. 그것 또한 가장 공이 들고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교훈을 남긴 것도 아니고, 그냥 텅 빈 자리로 남아 있는 아버지가 자꾸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신록이 아름답던 날에 떠나신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 호원숙 (수필가) 20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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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느낌은 달라도 사랑은 하나다

가족은 참 신기하다. 사람마다 가족이란 단어를 들으면 해석은 다를 수 있다. 'Family'의 뜻을 한국어 사전에서 찾으면 결과는 다양하다. 가족, 가정, 가구, 식구….

독일어 사전에서는 좀 더 간단하다. 'Familie'와 'Sippe'란 단어밖에 안 나온다. 게다가 'Sippe'는 옛말이고 요즘은 잘 쓰지 않는다. 의미도 약간 부정적인데, 큰 가족 단위의 구성원이 많다는 것이다.

다른 재미있는 차이점도 많다. '어머니'라는 단어의 경우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고, 학교 선생님이나 내 아이의 친구가 '어머니'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다. 미국도 비슷하다.

친구가 자기 친구의 어머니를 'Mom'이라고 불러도 된다지만 독일에선 그렇지 않다. 독일에서 자기 어머니를 빼고 다른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면 참 이상하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홈스테이 패밀리의 엄마도 나보고 무조건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다. 내 입장에선 엄마가 독일에 있어 다른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홈스테이 엄마와 적잖이 다퉜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제일 헷갈린 것이 '우리'였다. 특히 친구가 자기는 외동딸이라고 한 것 같은데, 자꾸 '우리 아빠'라고 하니 나는 '내가 잘못 이해했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친구에게 형제를 소개해달라고 했을 때 친구는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우리'라고 해서 동생이나 언니, 오빠가 있는 줄 알았는데….

가족의 이미지는 사회적으로도 차이가 많이 난다. 한국에서 멋있게 느끼는 점은 가족은 거의 '무조건'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분 나빠도 연락하고 다정하게 지내는 것 같다. 독일에선 기분 나쁘면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혼해서 배우자의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다면 그들과 연락을 끊는 사람도 있다. 한국에선 명절 때 가족이 '무조건' 다 같이 모여서 보내는데 서양에선 따로 보낼 때도 있다.

노인에 대한 이미지도 다르다. 한국에서 노인은 가족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며, 아이를 돌봐줄 때 도와주고 가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한다. 독일에선 반대다. 노인은 그동안 충분히 일했으니까 쉬게 해야 하는 입장이다. 노인도 보통 퇴직만 하면 '이제 자유다'라고 생각을 한다. 동양에서 노인은 적극적으로 자기 손자를 키우는 반면 서양에선 부모도 원하지 않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자기 아이를 힘들게 키웠으니 손자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하는 것보다 얼굴만 가끔 보고 잘해주고 싶어 하는 정도다.

이런 차이 속에서 나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가족 의미도 멋있지만 독일에선 독립적인 삶을 헤쳐가니 딱히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가족 대신 친구와의 유대가 더 튼튼해졌기 때문에.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다르게 본다는 것이다.

"서양 가족은 진짜 다정하지 않아?" 한국에서 자주 듣는 질문이다. 우리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빨리 독립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서양에서도 당연히 엄마, 아빠가 자기 아이를 똑같이 사랑하는데 방법만 다르다.

독일에서 대학을 다닐 때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기 문화와 언어를 알기 위해 다른 문화와 언어를 배워야 한다." 정말 다른 나라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을 때 내 나라에 대해 더 많이 배운 것 같다. '가족'처럼 세계 공통일 것 같은 간단한 단어에 사소한 차이가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놀랍다.

 

· 미르야 말레츠키 (번역작가 겸 방송인(독일)) 20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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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한다

딸이 태어나고 난 후 달라진 것이 있다.

이곳이 좀 더 좋은 세상이 되길 바라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그랬지만 그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그 이유는 딸아이가 자라서 살게 될 세상이 더 안전하고

따뜻한 곳이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극적으로 바라기만 하던 과거와는 달리

그 마음을 실천해보기로 했다.

무심코 버리던 작은 쓰레기도 다시 줍고,

운전도 살살 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도

웃으면서 대하고.

 

내가 세상에 바라는 대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같이 다니는 딸에게

모범을 보여줄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가 되기도 한다.

 

물론 잘 안될 때가 더 많다.

그 전의 습관이 있으니 지내던 대로 행동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내 주변을 따뜻하고 안전하게

만드는 작은 노력들을 계속해볼 생각이다.

당장 크게 달라지지는 않더라도….

 

다른 부모들도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들을 할 것 같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행동에 옮기고 있는 수많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작은 웃음, 배려, 친절들을 더하다 보면

우리의 아이들이 살게 될 세상은 지금보다 좋아지지 않을까.

 

· 김진형 (<딸 바보가 그렸어> 저자) 20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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