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시각장애인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한 여성에게로 다가간다.
“혹시… 황임숙 씨 아니에요? 어머, 맞아요? <소설 동의보감> 끝내줬어요~.”
25년간 시각장애인용 도서 녹음 봉사를 해온 황임숙(77) 씨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연예인이나 다름없다. 점자책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녹음도서는 시각장애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책을 접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매체다. 시각장애인들은 녹음도서를 통해 어둠 저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그 세계로 25년간 안내해온 이가 바로 황임숙 씨다.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에 소장된 황임숙표 녹음도서는 모두 976권, 복지관 전체 녹음도서 중 7.5%를 차지하는 많은 양이다.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황임숙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청아한 목소리로 25년간 시각장애인의 친구가 되어왔다.
그가 처음 녹음 봉사를 시작한 건 1989년, 작은딸을 유학 보내고 나서 경미한 우울증을 앓고 있을 때였다. 평소 그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조카는 그에게 녹음 봉사를 권했다. 호기심에 시각장애인복지관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봉사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복지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10명 정도 되는 장애인들을 만났어요. 당뇨로 실명한 사람, 시너가 눈에 들어가 실명한 사람…. 다양한 사연을 가진 분들이 있더군요. 그분들은 약시만 되어도 넘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때 ‘나는 이렇게 감사할 게 많았는데 그동안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에서 뭔가가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날부터 감사하는 생활이 시작됐죠.”
‘행복 바이러스가 되라’는 박 대통령의 말에 감동받아
그는 아침 7시 반에 출근해 저녁 6시까지 책을 읽는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복지관 녹음실 시설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여름에는 더위와 싸우느라 아이스팩을 발에 대야 했고, 겨울에는 담요와 전기방석이 필수였다. 그러나 봉사를 하면서 잃었던 밥맛을 찾았고, 누렇던 얼굴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녹음 봉사가 보약이었다.
“녹음 봉사를 시작한 그때가 제2 인생의 출발점이었어요. 하루하루가 정말 즐거웠습니다. 저의 목소리로 녹음한 책을 잘 읽었다고 격려해주시고 고마워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오히려 제가 더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죠. 어찌 보면 조금 도와드리러 갔다가 더 많은 것을 받은 시간들이었어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봉사를 다니는 그를 보고 남편은 “그럴 힘이 있으면 차라리 돈을 벌지”라며 못마땅해했지만, 그가 점차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큰 후원자가 됐다.

“나중에는 남편도, 아이들도 저를 자랑스러워하더라고요. 아이들도 엄마 목소리를 기다리는 독자들이 많은데 복지관에 안 가면 안 된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황임숙 씨만큼 긴 시간 동안 꾸준히 녹음 봉사를 한 사람은 드물다. 한 달에 신간 30권 중 7, 8권을 읽던 시절도 있었다. “신간을 시각장애인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책을 하도 읽으니 좋은 책을 고르는 감각도 생겼다.
“봉사의 첫째 요건은 사명감이에요. 그리고 책을 좋아해야 하죠. 저는 시각장애인들이 제 오빠다, 딸이다,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요. 녹음실이 작아서 답답하다고 그만두는 봉사자들도 있더군요. 그런데 저는 녹음실만 들어가면 잡념이 없어졌어요. 버스 정류장에서 복지관까지 걸어가면서도, 떨어지는 낙엽 하나, 푸른 이파리 하나를 보면서도 매일 감사 기도를 합니다.”
25년간 한결같이 봉사를 해왔지만 그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봉사자들이 많아지면서 좋은 책을 녹음할 기회가 예전보다 적어진 것. 이 때문에 ‘다른 봉사를 해볼까?’ 하며 그만둘 생각도 해봤단다. 그러던 중 국민추천포상 시상식에서 국민포장을 받게 됐고, 시상식과 만찬에서 자신보다 훌륭한 선배들을 만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저보다 열 살이나 많지만 현역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을 만났어요. 제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박근혜 대통령도 봉사자들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려달라’고 하셨어요. 이제 그만 은퇴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번쩍 나더군요. 제가 읽을 책은 여전히 많습니다. 제 소원은 오늘까지 녹음하고, 내일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글·두경아 (위클리 공감 기자) 2015.1.12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