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 위상 드높인 '허영만展-창작의비밀'
문하생 생활 8년 끝에 공모전으로 데뷔. 만화가 인생 40년 동안 215편의 작품, 15만 쪽의 만화를 그렸고 60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30편에 가까운 작품은 영화, 드라마, 게임으로 제작됐다.
10년간 매달 2회 전국을 돌며 취재해 300만 부가 팔린 <식객>을 완성했고, 다시 10년간 2만km의 현장 고증을 거쳐 <말에서 내리지 않는무사>를 세상에 내놨다. 2015년 지금도 신작을 연재하고 있으며, 107세까지 현역 작가로 사는 게 꿈이다. 가장 좋아하는 말은 “나는 오늘도 진화한다.”

▷관람객들이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과에서 전시 중인'허영만展-창작의 비밀' 가운데 <날아라 슈퍼보드>의 드로잉을 살펴보고 있다.
숫자로나마 가늠해볼 수 있을까. 스스로는 늘 2등을 목표로 했다고 하지만 누구도 따라잡기 어려운 업적이다. <식객>, <각시탈>, <날아라 슈퍼보드>, <타짜> 등 다수의 국민만화를 탄생시킨 허영만 화백의 이야기다.
그가 데뷔 40주년을 맞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허영만展-창작의 비밀’ 전시를 열고 있다. 예술의전당에서 국내 만화가의 전시는 처음이라지만, 그가 한국 대중문화계에 미친 파급력을 따지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전시 중인 500점의 그림이 15만 장의 원화와 5000장이 넘는 드로잉 가운데 선별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그렇다.

▷예술의전당 건물 외부의 전시 포스터.
시대 꿰뚫는 통찰력 <타짜>는 도박 아닌 인간 욕망이 주제
허영만 화백이 지금까지 그린 총 215편의 만화 제목을 육필로 적은 전시물을 자세히 보면 지우고 고쳐 쓴 부분이 눈에 띈다. 본인 스스로도 방대한 작품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한 달에 27권을 집필하던 공장식 제작 방식이 유행하던 시기를 되돌아보며 “너무 많이 쓴 것 같아 부끄럽다”며 졸작을 자책하는 말도 했다.
그러나 그만큼 세밀하고 꼼꼼하게 만화를 그린 이도 드물다. 칭기즈칸을 주인공으로 한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의 한 장면을 200배로 확대한 작품에서는 수백 개의 선으로 표현된 초원 예언가의 괴기스럽고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만화의 잉크 작업을 하던 문하생은 손가락에 류머티즘 관절염을 얻었다.
“이렇게까지 확대했을 때 화면이 깨지지 않는 그림은 드물다. 그만큼 그림의 밀도가 깊다는 뜻이다”라는 게 주최 측의 설명이다.
‘사제전’ 전시장에는 <미생>의 만화가 윤태호가 허 화백의 문하생 시절 그렸던 컷이 전시됐다. 허 화백은 윤태호의 <이끼>를 보고 컬러 공부를 시작했을 정도로 근성이 대단하다. 작품 구상과 취재를 위해 모아놓은 메모도 셀 수 없다. ‘창작의 비밀’이 거기에 있다.
40년 전 “3년 안에 성공하지 못하면 만화를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허 화백은 데뷔 3개월 만에 <집을 찾아서>가 소년한국일보 제 2회 신인 아동만화 공모에 당선돼 이름을 알렸다. 1974년 작 <각시탈>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각시탈을 쓰고 일제에 항거한 주인공 이강토의 이야기를 그리며 “우리는 위대한 지난날을 역사로밖에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책으로써 후대에 이야기를 전한다”고 말했다.
허영만 화백의 작품에는 세상과 시대를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다. 1960년대 한창 날리다 은퇴한 세 명의 도박꾼을 만난 후 그린 <타짜>에서 도박은 소재일 뿐 광복 이후와 개발 시대, 도시화·서구화 시대를 거치는 동안의 혼란과 인간의 욕망, 만인군상의 심리가 주제다.
1980년대 중앙정보부로부터 반공만화를 제안받은 뒤 ‘간섭하지 말라’는 조건을 내걸고 그린 <오! 한강>은 당시 대학생들의 필독 도서였다. 대중문화의 호황기였던 1990년대에 쓴 <비트>는 방황하는 젊은이의 고민과 사랑을 그린 청춘 문화의 상징이었다.

▷전시장 내부에서 상영 중인 허영만 화백의 인터뷰 영상.
대중문화 콘텐츠 저변 확대 ‘만화’ 넘어선 ‘콘텐츠’로 봐야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 27일, 5월의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 허영만전을 관람했다. 박 대통령은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웹툰을 직접 보고 만화가와 웹툰 작가, 작가 지망생 등과 대화의 시간도 가졌다. 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호기심과 상상력, 즐거움을 주며 40년 창작의 길을 걸어온 허 화백과 신진 만화가, 예비 만화가들을 격려하면서 “창작자 중심의 만화 유통 환경 조성과 해외 진출 지원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그림을 조각, 영상, 건축물 등 다양한 콘텐츠로 만날 수 있다. 조각가 박기봉은 <각시탈>과 <무당거미>의 이강토, <제7구단>의 고릴라 미스터 고, <식객>의 성찬을 스컬피로 제작해 평면의 그림을 3차원의 입체 형상으로 구현했다. 건축가 정성철은 허영만 화백의 엄지손가락 지문을 골판지로 형상화한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각시탈>의 원화를 4면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움직이는 그림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은 독립 작품으로도 손색없을 만큼 새롭다. 어린 시절 방안에 쪼그리고 앉아 침 묻혀가며 읽던 만화책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만화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를 기획한 한원석 총감독은 “만화가 다른 대중문화와 결합해 다양한 콘텐츠로 거듭나고 있는 것처럼 전시 역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도록 기획했다”고 말했다. 6명의 큐레이터가 2년 동안 기획하고 15만 장의 원화를 스캔해 새로운 형태로 변형했다.
한 감독은 여전히 만화를 만화 ‘정도’로만 보는 시각을 아쉬워한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는 만화를 넘어 대중문화 콘텐츠로 이해해야 한다. 전시장을 찾아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위상을 느껴보길 권한다.”
허 화백은 현재 중앙일보에 <커피 한잔 할까요>를 연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커피를 못 마신다는 그는 특유의 근성과 꼼꼼한 취재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그는 오늘도 진화한다.

▷허 화백은 1974년부터 40년간 215편의 작품을 그렸다. '연보존'에서는 시대별 그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그곳에는 우리 추억의 한 컷이 있다.

글 · 조영실 (위클리 공감 기자) 20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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