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6·25전쟁 참전 여군 16명이 올해 현충일에 국가유공자 증서를 받았다. 2400명으로 추산되는 6·25전쟁 참전 여군은 대한민국 공동체를 지키는 여군의 시초. 올해 국가유공자로 선정된 참전 여군을 만나 그들의 군복무 시절 얘기를 들어봤다.

▷김형우 기자
여자의용군 제2기 자원입대
육군본부 예술대 군악반 클라리넷 담당 이창애 씨
“6·25전쟁 때 인민군이 밀려들어왔잖아요. 당시에는 피난도 못 가고, 학교도 못 가고 어찌 될지 모르니 군대 가는 게 낫겠더라고요. 학교 밴드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학교로, 집으로 군악대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어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지원했지요.”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이창애(83) 씨는 한성중학교 4학년(현 한성여고)에 다니던 1950년 12월 1일, 한성중학교 밴드부 단원 14명과 함께 여자의용군 제2기로 자원입대했다. 이 씨는 입대한다는 두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입대 사전 교육을 위해 서울 퇴계로 인근 초등학교에서 그동안 못 본 밴드부원들을 만나 반가운 마음이 앞섰 다고 한다.
밴드부원들의 부모는 ‘군대가 밖보다 더 안전하다’고 여기며 딸의 입대를 허락했다. 특히 이 씨 부모는 첫째 딸이 수도육군병원(현 국군수도병원)에서 재정과 ‘군속(현 군무원)’으로 근무해 군대에 대한 신뢰가 있던 터라 둘째 딸인 이 씨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부모님이 군 입대를 반대하실 이유가 없지요. 1950년 전쟁이 나고 9·28 수복 전인 7~9월까지는 서울이 빨갱이 통치를 받고 있어서 밖에도 나가지 못했거든요. 나가면 반동분자로 몰려서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부모님이 먹을 것 구하러 나가시는 것 외에는 가족이 모두 집에만 숨어 있었어요.”
2개월여 동안 사전 교육을 받은 이 씨는 육군본부 예술대 군악반에 소속돼 클라리넷을 맡았다. 이후 군악반은 본격적인 활동에 앞서 12월 24일 여군훈련소가 있는 부산으로 향하게 됐다. 그 전날 외출 허가를 받은 이 씨는 가족을 만나러 갔지만 가족들은 모두 피난간 상태. 부산에 도착한 이 씨는 크리스마스이브에 교회에서 흘러나 오는 노래를 들으며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이 씨는 이내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학교에서 그랬듯이 낮에는 연습하고, 행사 있을 때는 공연을 다니며 활기차게 살았다.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공연했기 때문에 위험한 줄도 몰랐다. 밤에는 총성이 울리기도 했지만 새벽이 되면 그 소리는 잦아들었다.
“공연을 가면 장병들이 얼마나 환대해줬는지 몰라요. 우린 행진곡을 주로 연주했지요. 워싱턴 광장, 워싱턴 포스턴 마치, 오리엔털로즈… 한번은 병상에 계신 분들에게 위문 공연을 간 적이 있는데 중환자들은 못 나오고 경환자들만 구경하고 그러는데, 뭐랄까, 고맙고 안타깝더라고요. 저 사람들이 지켜줘 우리가 안전하게 있다는 생 각이 들어 정말 고맙더라고요.”
이후 이 씨는 학교 복학을 위해 이듬해인 12월 전역해 동덕여고에 편입한 뒤 서울대 음대에서 기악을 전공했다. 28세 때 서라벌예대(현 중앙대)에서 작곡을 전공한 남편과 결혼했고, 이후 미 8군 MGM 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이창애 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여자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군대에서 제 몫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군 생활이 참 보람됐어요. 우리가 다니면서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고.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요.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건데, 어쩌면 그때 음악인으로서 가장 보람된 일을 한 게 아닌가 싶어요.”

▷홍종식 기자
여자의용군 제4기 자원입대
교환병으로 복무 이춘이 씨
“중학교 2학년 때였나. 친구 둘이랑 군청에 갔는데 여군 모집 포스터가 붙어 있더라고. 한 여군 대위가 군청에서 딱 나오는데 너무 멋있었어. 워커 신고, 옷 입은 것도 예쁘고. 대위한테 ‘우리도 원서 넣어도 되냐’고 물으니까 ‘된다’고 하더라고. 부모님 허락이 있어야 신청할 수 있었는데, 집에 가서 아버지 인감도장 훔쳐와 서류에 찍고 입대 신청했지.”
서울 구로구에 거주하는 이춘이(77) 씨는 1953년 6월 여자의용군 4기생으로 입대했다. 당시 16세인 그는 수원군청 면접시험장에서 면접관이 군 입대 동기를 묻자 “여자도 군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돌해서일까. 체격이 건장해서일까. 군 입대에 지원한 두 친구가 받지 못한 합격 통지서를 이 씨는 쉽게 받았다고 한다.
그가 자원입대한 이유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1남매를 둔 부모는 딸까지 고등교육을 시킬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런 딸의 의지를 꺾지 못해서일까. 이 씨의 부모는 입대 합격 통지서를 내미는 딸을 말리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논산훈련소에 보냈다.
“여자의용군 4기생 96명이 비가 철철 내리는 날 논산훈련소에 갔는데, 천막과 철망만 보이니까 너무 무서운 거야. 천막에서 먹고 자고 작업하면서 6개월 동안 훈련받았지.”
공부하고픈 열망이 큰 이 씨는 장교 시험을 돌파구로 삼았다. 하지만 영작문에 능숙하지 못해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끝내 영어의 벽을 넘지 못한 그는 유선 교육을 받아 교환병이 돼 광주, 대전, 원주, 제주도 병사구사령부(병무행정의 중간 통할기관)에서 복무했다.
“힘들지는 않았어. 대구 육군고급부관학교에서 행정교육 받을 때 조금 기합 받고 그랬지. 잘못 걸리면 운동장 50바퀴도 돌려. 여자라고 사정 봐주지 않아. 군대 생활은 차이가 있으면 안 돼. 한때는 ‘여자가 집에서 눌은밥이나 긁어 먹지 군대는 뭐하러 왔느냐’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 명찰 딱 뜯어서 갖다 주면 그 사람들 영창 아니면 징계라 말조심들 했지. 상급자 되어선 장교와 같이 여군 모집하러 다녔어. 직속 부하랑 다니니까 대우는 잘 받았지.”
객지로 다니는 것이 힘들어서일까. 이 씨는 1957년 5월 2군사령부에서 이등상사로 제대했다. 그는 (옆방에 있는 남편을 가리키며) “저짝 방에 있는 남자가 부산 헌병대에 있었는데 만나고 있었다”면서 “더 이상 사사로운 얘기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시댁이 있는 경기 김포에서 살며 아들 하나를 둔 그는 군대에서 더 복무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 간 건 참 잘한 것 같아. 오빠는 여자가 군대 갔다 온 게 흠이 된다고 그때 사진을 다 태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일찍 제대하지 말고 장교 시험을 봐서 군대에서 끝장을 볼걸. 군대에 더 있던 동기들은 나중에 사령관이 됐거든. 난 뭐가 급하다고 제대를 했는지 몰러. 너무 아까워. 여자들도 군대 자원하면 좋겠어. 우리 손녀딸들도 시집가지 말고 멋지게 군인으로 살면 좋겠어. 한평생 사는 거 잘 살아야 하지 않겠어?”
글 · 이혜민 (위클리 공감 기자) 201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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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