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지난 9월 20일 ‘2014 대한민국 가을예술축제’ 개막식이 있던 날, 나도 은행나무 그늘에 기대어 클라운(Clown·광대) 마임(Mime)의 대가 김찬수의 공연을 보았다. 빨간 산타 코를 달았고, 눈과 입 주변에는 흰 동그라미를 과장되게 분장했다. 큰 신발과 울긋불긋 화려한 광대 복장은 거리공연축제가 펼쳐지는 대학로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그가 대학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무슨 재미난 일이 곧 펼쳐질 것처럼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유치원 아이들에게는 클라운의 우스꽝스러운 복장이 낯설었나 보다.
하이파이브를 청하는 그의 손을 피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광대에게 가장 매료될 사람들은 아이들이 될 터인데 말이다.
아르코예술극장 앞에서는 캐나다 예술가 제이미 이튼의 저글링과 외발자전거 퍼포먼스로 환호성이 터졌다. 그가 관객을 향해 한국말 숫자 “하나, 둘, 셋”을 외치자 관객들은 “와~” 하는 함성을 쏟아냈다. 그의 공연이 끝나자마자 다시 은행나무 아래로 시선이 향했다. 김찬수의 마임 공연 뒤로 바로 일본에서 온 다이스케의 공연이 시작됐다. 노란색 셔츠와 양말을 신은 다이스케는 손에 들고 있던 기구를 계속해서 일부러 떨어뜨렸다. 그러면 공연을 보던 아이들이 달려나와 기구를 주워 그에게 전해 줬다. 이번에는 다이스케가 기구를 떨어뜨리는 척하다가 잡았다. 순간 뛰어나오던 아이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들이 즐겨하는 ‘얼음 땡’ 놀이의 얼음 포즈가 저절로 나왔다.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어른 관객들의 웃음이 펑 터졌다.

대학로 거리공연 이어 야외공연장서 ‘황홀한 축제’
마로니에공원 이곳저곳에서 펼쳐지던 거리공연이 막을 내리고, 야외공연장에서 ‘2014 대한민국 가을예술축제’ 개막식이 열렸다.
대학로거리공연축제,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서울세계무용축제, 서울아트마켓을 ‘가을예술축제’로 통합하여 한국의 대표 축제로 활성화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개막식도 관객이 함께하는 예술축제로 만들기 위해 야외공연장에서 이뤄졌다. 배우 서이숙과 이원종이 사회를 맡아 친근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가을예술축제’ 소개와 관계자 인사가 끝나고 전통문화예술단체 들소리의 소원성취 콘서트 <월드비트 비나리>가 시작되었다.
‘비나리’는 순우리말로 ‘앞길의 행복을 비는 말을 하다’는 뜻인 ‘비나리하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2003년부터 53개국 월드투어를 통해 세계에 알려진 그룹이다. 꽹과리·장구·징·북·가야금·거문고·태평소 등 다양한 악기의 역동적인 소리가 가을축제를 장식했다. 관객의 어깨가 들썩거리고 신나는 가락에 이끌려 추임새 “얼씨구, 좋다~”가 절로 나왔다. 가을축제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신명나는 소리로 축원 메시지를 띄웠다. 공연은 점점 급물살을 탔다. 허새롬의 생황과 가야금 합주는 아스토르 피아졸라 <탱고>로 가을 분위기를 한층 무르익게 했다. 우리 악기로 연주되는 애절한 탱고가 가을밤을 적셨다.
이렇게 혜화동 길거리 곳곳에서 펼쳐진 한바탕 거리축제는 시끌벅적하게 끝났다. 마로니에공원 은행나무에 어둠이 내리고 달이 걸리자 이어 시작하는 ‘2014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로 아르코예술극장 앞에는 환하게 조명이 비춰졌다. 로비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목소리에 기대감이 서려있다. 축제는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각성제이다. 공연예술과 무관하게 살다가 이런 축제에 관객으로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무대 위의 배우가 된 듯 황홀하다.
개막작 <노란 벽지> 공연 전에 조촐한 개막식이 열렸다. 로비에 설치된 브라운관에서는 개막작 외에 공연 작품들을 소개했다. 10월 19일까지 25일간 9개국 25개 작품이 선보인다. 그중 해외 연극은 6개 작품이다. 케이티 미첼의 <노란 벽지>, 제스로 컴튼의 <벙커 트릴로지 :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 라울 콜렉티브 <산책자의 신호>, 알렉세이 보로딘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등이다. 그 가운데 개막작으로 선정된 <노란 벽지>는 전석 매진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관심이 뜨거운 작품이다. 이 작품은 미국 여권주의 작가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1860~1935)의 동명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1892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미국 페미니즘문학의 시초로 더 유명하다. 우리말로 번역(창비세계문학 <필경사 바틀비> 수록)돼 발간됐다. 연출가가 원작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했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개막작 <노란 벽지>는 연극과 영화의 앙상블극장에 들어서면 독특한 무대 구성이 눈에 띈다. 왼쪽 구역에는 노란 벽지로 도배된 방이 있다. 침대와 테이블 등 간단한 소도구가 놓여 있다. 다른 연극과 달리 그 앞에 카메라 4개가 설치돼 있다.
노란 벽지는 따뜻한 느낌이 아니라 어쩐지 음산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오른쪽 방에는 노란 벽지가 갈기갈기 찢겨나간 흔적이 남아있다. 사연 많은 방들 사이에 속이 훤하게 보이는 유리방이 하나 끼어 있다. 그리고 무대 위로는 거대한 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배우와 함께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무대에 올랐다. 남자 주인공이 아이 침대를 이리저리 옮겼다. 4대의 카메라가 빠르게 움직였다. 카메라는 배우의 얼굴을 가까이 잡고, 그 생생한 표정이 스크린으로 전달되었다. 다르게 보면 영화를 찍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와 보모가 가구를 옮기고 있을 때 주인공 ‘안나’가 불안한 얼굴로 들어선다. 유리 박스에도 안나의 내면의 목소리를 독백으로 들려줄 배우가 등장했다. 원작은 일기 형식의 1인칭 독백체이다.
연극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안나와 그녀의 남편, 아이, 그리고 보모가 함께 시골로 요양을 왔다가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엮은 스릴러 드라마다.
무대 위에 설치된 스크린이 여인의 심리 변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됐다. 카메라맨은 복도, 욕실 등을 오가며 배우의 표정을 클로즈업했다. 스크린을 통해서 그녀의 불안했던 눈빛이 점점 어떤 확신에 의해 광기를 띠는 것을 볼 수 있다. 관객은 숨을 죽이고 점점 더 몰입한다. 그러면서 안나의 이상행동에 측은지심이 생기며 묘한 공감이 이뤄진다. 그리고 스크린은 안나의 과거 모습을 영화처럼 보여준다. 무대 위 연극과 스크린 속 영화의 조우를 통해 양쪽을 넘나들면서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19세기 페미니즘 소설이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이유는 뭘까.
연극을 보고 난 뒤에도 답답함은 여전했다. 연출가 케이티 미첼은 당대의 여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벽에 갇혀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21세기에는 벽뿐만 아니라 멀티미디어도 새로운 벽이 될 수 있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끊임없이 관찰당하는 멀티미디어를 통해 또 다른 벽을 보는 듯하다.
우리가 그 벽에 꽃무늬 벽지를 바르고 아름답다 하거나, 자의식으로 벽지를 뜯거나 그것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 잘 만든 연극과 영화를 동시에 관람한 기분이다. 케이티 미첼의 <노란 벽지>는 멋진 퍼포먼스였다.
서울세계무용축제·서울아트마켓도 잇달아 열려
개막공연을 보고 나오니 앞으로 이어질 행사에 대한 관심이 커져만 갔다. 팸플릿을 뒤져봤다. 국제공연예술제와 함께 열리는 서울세계무용축제에 관심이 간다. 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에서 주최하는 행사라 평소 보기 힘든 세계적인 무용수들이 참여하는 라인업을 갖췄다.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데 프랑스의 자존심 마기 마랭의 신작 <징슈필>과 총체예술의 거장 필립 장띠의 <나를 잊지 마세요>는 이미 입소문을 타서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란다. 당장 7일부터 열리는 ‘서울아트마켓(PAMS)’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을 돕는 자리라고 한다.
TV프로그램 <무한도전>에 나와 화제가 됐던 안무가 안은미의 개막공연도 기대가 된다. <몸 박물관>이라는 제목에서부터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앞으로 한달. 그 기간 동안 펼쳐질 문화행사 덕분에 나의 가을이 얼마나 즐거울지 벌써부터 두근거린다.
글·기쁜샘(자유기고가) 201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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