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2013년 3월, 통영 좌도(佐島)는 온통 꽃밭이다. 산등성이마다 밭마다 집마다 매화 향기가 가득하다. 통영의 섬. 좌도는 본래 모섬인 한산도의 좌(左)측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도울 좌(佐)’ 자를 쓴다. 통영에서 5.5킬로미터 떨어진 면적 1.17평방킬로미터, 해안선 길이 3.5킬로미터의 아담한 섬이다.
좌도는 섬 전체가 한 덩어리의 산이다. 산의 동서에 동좌리와 서좌리 두 개의 마을이 자리한다. 나그네는 서좌마을에 내린다.
2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안길을 걷는다. 매화나무 한두 그루 없는 집이 없다. 섬은 전체가 매화꽃으로 가득하다. 서좌리길 90-47. 사람은 떠나고 빈집으로 남았다 이웃 주민의 창고가 된 지 오래다. 처마 밑에는 장작이 쌓여 있고 부엌에는 비료와 소금·작두·그물이 널려 있다. 마당은 텃밭으로 변했고 벽에는 온갖 약재가 걸려 있다. 바람과 햇볕에 익모초와 느릅나무껍질·산도라지·수세미가 말라간다. 건너편 집에서 물건의 주인인 듯한 초로의 아주머니 한 분이 걸어 나오신다. 지난 가을 산과 들에서 손수 얻어다 말린 약초들이라고 한다.
수세미는 감기가 들면 삶아 드신다고 했다. 익모초는 쓰지만 대추와 감초를 넣어 끓여 마시면 여자들에게 무조건 좋단다. 느릅나무 껍질은 위가 헐거나 하면 끓여 먹는다.
참깨를 털고 난 깻단은 땔감으로 남겼다. 좌도 사람들에게 매화는 약나무다. 배가 아프고 속이 거북하거나 기침이 나오면 매실액을 타 먹으면 씻은 듯이 낫는다고 한다. 해풍 맞고 자란 쑥이 그렇듯 해풍 속에서 큰 매실이어서 약효가 더 뛰어나다고 좌도 사람들은 믿는다.
서좌리마을 언덕을 올라 동좌리재를 넘는다. 더 이상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 서좌리와 동좌리 두 마을은 해안도로로 연결돼 지금은 굳이 힘든 고갯길을 넘어 다니는 사람이 없다. 고갯길을 오르는 내내 매화 향에 취한다. 마을 뒤안은 비탈밭 가득 매화농원이다.
좌도의 매화농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됐다. 가와우지(川河)라는 일본인이 입도하면서 매화나무를 들고 왔다. 가와우지는 동좌리마을에 정착하면서 야산을 개간해 매화나무와 감나무 등의 유실수를 많이 심었다. 동좌리 주민들은 그때부터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서좌리 매화의 시초는 동좌리와 조금 다르다. 서좌리에서는 30여 년 전 한 마을사람이 하동에서 매화묘목을 가져다 심었다.

고갯마루 밝히는 생강꽃 노오란 꽃등 눈부셔
더 이상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고갯길이지만 아직 수풀이 자라지 않아 다니기에 불편함은 없다. 마루를 넘어서면 재의 이름이 서좌리재로 바뀐다. 고개는 같은 고개인데 이름은 둘이다. 서좌리 사람들은 동좌리재라고 하고, 동좌리사람들은 서좌리재라고 부른다. 서좌리사람들에게는 동좌리로 넘어가는 재이니 동좌리재였을 것이고, 동좌리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기야 누가 어떻게 부르든 무슨 상관이랴. 더 이상 사람이 넘나들지 않는 고갯길인 것을.
본디 이름 없는 길에 사람이 다니면서 이름이 생겼다. 사람이 다니지 않음에 따라 이름도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이길은 자연의 것을 사람이 잠시 빌려 쓰던 것이다. 그것을 다시 주인에게 되돌려준 것이다. 어느 땅도 본디 사람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물건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값을 매겨 받으면서 자연으로부터 빌린 것은 그것이 지구 전체일지라도 동전 한 닢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땅과 바다와 강과 공기까지 다 자연의 것 아닌가? 그럼에도 대가는커녕 함부로 파괴하고 소진하는 데만 안간힘을 쓴다.
동좌리로 넘어서려는데 불현듯 밝은 빛에 눈이 부시다. 등불이 걸렸다. 생강꽃 노오란 꽃등이 그늘진 산길을 밝힌다. 나그네의 어둡던 마음길도 다시 환해졌다. 생강나무꽃은 그 생김이 비슷해 자주 산수유꽃으로 오해받고는 하는 초봄의 전령이다.
길가 양지녘에 봉분이 몇 솟았다. 볕 좋고 전망 좋은 최고의 자리는 어김없이 유택이다. 복 많은 망자들. 무덤 앞을 지나는데 숲 속에서 놀란 고라니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아난다. 그러고 보니 이 섬의 밭에는 모두 그물을 쳐놓았다. 고라니에게 작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고육책이다.

야생동물과 서로 경계 지으며 사는 섬
사람과 야생동물이 이렇게 서로 경계를 지으며 공존한다. 야생동물을 그저 곡물에 피해를 입히는 침입자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함께 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면 충분히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고갯길의 중턱쯤 내려오니 작은 시멘트 건물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이 섬 주민들의 식수원이다. 상수도가압장. 땅 속의 물을 끌어올리는 관정이다. 관정 바로 옆에는 무덤이 널려 있다.
섬의 공동묘지. 사람 사는 마을의 뒷산이 북망산천이고, 이곳에 관을 묻어 뽑아 마을의 식수로 사용한다. 망자들의 살과 뼈가 묻힌 땅에 우물이 있으니 삶과 죽음은 저토록 적나라하게 이어져 있다.
동좌리마을 물양장에 주민들이 둘러앉아 굴 양식을 위한 채모작업을 한다. 좌도는 굴과 멍게를 양식하는 집이 몇 있지만 노령인 대부분의 주민은 어업노동자로 살아간다. 굴을 까거나 굴 채모작업을 해주고 임금을 받는다. 굴공장은 한산도에 있다. 새벽 3시면 공장에서 배가 와 주민들을 실어간다.
오후 4시가 돼야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노임은 일한 만큼 받는다. 종일 굴을 까면 삼사십 킬로그램쯤 깔 수 있다. 깨끗하게 손질한 신선한 굴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섬사람들의 이토록 고된 노동 덕분이다.

“나이가 칠십인 사람을 젊다고 그랍니다”
주민들은 또 굴 양식업자들의 채모작업에도 품팔이를 한다. 작업을 하는 10여 명 남짓한 주민 대부분은 할머니다. 섬에서 드문 젊은 여자도 보이고, 할아버지도 한 분도 섞여 있다. 채모작업을 지휘하던 할아버지가 대뜸 말을 건넨다.
“어찌 오셨소?”
작업을 지휘하는 할아버지는 동좌리 이장님이다. 다른 젊은 사람이 없어 나이 칠십 노인이 이장 일을 본다.
“나이가 칠십인디, 칠십 된 사람을 젊다고 그랍니다.”
굴 씨앗이 붙은 가리비 껍질을 줄에 꿰는 채모작업. 6미터50센티미터 줄 하나에 보통 28개 정도의 가리비 껍질을 끼우고 묶는다. 줄 하나 꿰는 데 300원씩 받는다. 종일 줄을 꿰어봐야 노인들 용돈벌이에 그칠 정도다. 늙은 섬, 동좌마을에는 온통 매화꽃이 피었지만 노인들은 꽃놀이할 틈이 없다.
좌도의 매실은 가공해 팔기도 하지만 대부분 생매실로 판매한다. 일손이 없으니 자식들이 휴가를 받아 매실을 따러 온다.
일부는 매실장아찌·매실액·매실씨베개·매실주 등으로 가공해 판매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감나무가 많았지만 제대로 결실을 보기가 어려웠다. 감이 익을 무렵이면 꼭 태풍이 불었다. 그래서 태풍 불기 전에 수확하는 과실나무를 찾다 차츰 매실나무로 바꿔 심게 됐다. 좌도가 매화섬이 된 또 다른 이유다.
섬의 해안도로를 따라 다시 서좌리마을로 돌아간다. 서좌리에서는 10여 가구가 멍게와 굴을 양식한다. 해삼이나 바지락도 많이 나는 편이다. 굴보다 멍게 양식의 수익이 많다고 한다. 굴은 수익이 적은 대신 투자비용도 적게 든다. 굴은 안전한 사업이다.
하지만 멍게는 수익이 많은 대신 위험한 사업이다. ‘멍게물렁병’이 한번 왔다 하면 다 죽어버린다. 예전에는 여름에만 물렁병이 왔는데 지금은 겨울에도 안심할 수 없다. 고수온 현상 때문이다.
위험부담을 안고 하는 것이니 일종의 투기사업이다. 하지만 멍게는 뒷돈이 안 드니 물렁병만 안 생기면 힘들이지 않고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 섬 주민들은 “바닷일은 용왕님네가 알아서 한다”고 말한다.
좌도에는 민박이 없다. 서좌리 이장님 댁을 찾았다. 마을회관에서라도 재워달라 부탁하니 회관의 난방시설이 고장났다고 한다. 어찌할까 난감하다. 이장님께서 재워주시겠단다.
따뜻한 밥상까지 받으니 눈물겹게 고맙다. 집나가면 배고프다고 이장 사모님은 연신 밥을 더 먹으라 하신다. 이름도 신분도 낯선 나그네를 집에 들이고 먹이고 재워주시는 그 마음이 따뜻하다.
나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낯선 이를 집에 들이고 먹이고 재울 수 있을까? 이장님은 어촌계장에 노인회 총무 일까지 겸한다. 아들 덕에 지난해에는 동유럽 5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장님은 건너 섬 추봉도가 고향이다. 결혼 후 분가하면서 추봉도에서는 집 지을 땅을 살 수 없어 좌도로 들어왔다. 39년째 사니 좌도 또한 고향이다. 어류 양식도 조금 하지만 멍게 양식이 주업이다. 이장댁은 한산도 여차가 고향이다. 사촌언니의 중매로 22세에 이장님을 만났다.
“사촌언니가 착한 사람 있다고 소개했어요. 만나봤더니 착하데요.” 그래서 바로 결혼을 결심했다.
“그때는 직장 안 따졌어요. 사람 됨됨이 보고 간 거지. 지금처럼 돈 안 따졌어요.”

민박 없는 좌도에서 매화꽃보다 더 후한 환대
시집와서 보니 시부모는 물론 시할머니에 시할아버지까지 식구가 15명이나 됐다. 보리와 쌀 한 가마니가 보름이면 동났다. 어른들 모시고 3년을 살다 분가해 좌도로 들어왔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농사도 짓고 바닷일을 거들었다. 아이 업고 나가 고랑에 눕혀놓고 고구마를 캤다. 멍게 양식장에도 매일 따라다녔다. 바닷일에 농사에 아이들 키우고 집안일까지 혼자 감당해야 했으니 얼마나 신산스러웠을까?
“옛날에는 어느 사람 없이 다 고생하고 산걸. 내만 그런 게 아닌걸. 그런 걸 고생이랄 거 있습니까? 나무하고, 고구마 심고, 밥하고, 애 키우고, 조개 캐고…. 안 그러고 먹고산 사람 있나요?”
아이들은 도시로 고등학교를 보냈다. 어려서부터 떨어져 자랐지만 부모 속 썩인 거 하나도 없단다. 다들 대기업에 취직해 잘산다고 한다. 부부는 이제 아무런 걱정이 없다. 두 내외 먹고 살 만큼만 양식을 하고 편히 지내려 한다. 이장댁의 얼굴에서는 고생 끝에 낙을 찾은 편안함이 엿보인다. 봄날, 좌도 이장댁의 웃음이 매화꽃보다 화사하다.
글과 사진·강제윤 (시인·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