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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이번 봄에는 희망씨앗 뿌리겠습니다

1

 

“재기하면 떳떳하게 가족을 만날 겁니다. 당장은 짐밖에 안 될 테니까요.”

이봉춘(61)씨는 이번 설에도 헤어진 가족을 찾지 않고 홀로 명절을 보냈다. 집 없이 떠돌며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설움이 기억난 듯 북받친 목소리였다. 말을 잇던 그의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그럼에도 ‘떳떳하게’라는 대목에서는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이제 곧 7년간의 노숙생활을 정리하려는 참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조만간 짐을 꾸려 경북 예천에 있는 자신의 밭을 돌보러 갈 계획이다.

1970년대 말 사우디아라비아를 오가며 5년간 지게차 기사로 일한 그는 당시 어린 나이에 제법 돈도 벌었다. 결혼 전에 벌써 부산에 번듯한 집도 한 채 샀다. 지게차 기사 일을 그만둘 즈음 결혼했다.

이후 안정적으로 살고 싶어 박봉임에도 시 기능직 공무원의 길을 택했다. 주차단속 등 주로 외근직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월급은 조금씩 올랐지만 생활은 여전히 넉넉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씨는 1983년 첫 딸을 낳고 3년 후에는 둘째를 보면서 보람을 갖고 살았다. 단란했던 가정은 1997년 갑작스레 둘째딸이 병에 걸리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혈병이라더군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건강한 혈소판을 구하느라 8년간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나 이씨의 둘째딸은 오랜 투병생활 끝에 고등학교 졸업식을 한 달 앞두고 2005년 1월 세상을 등졌다.

“치료비를 대느라 사채까지 끌어 쓰는 바람에 남은 건 2억여원에 달하는 빚더미뿐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재산에 대한 압류절차가 진행됐고, 월급은 절반을 미리 떼였다. 딸아이의 죽음 직전에는 집이라도 살려볼 셈으로 아내와 합의이혼까지 했다.

그럼에도 이씨는 남은 부채를 갚지 못해 결국 딸의 장례를 마치고 무작정 상경했다. 사실상 도피생활이었다. 서울에서 처음 찾은 일은 공사판 일용직이었다. 영등포·용산 등지를 전전하며 막노동을 했다. 품삯 몇 푼을 손에 쥐면 심적 고통과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술을 마시고는 했다. 그렇게 건강을 돌보지 않은 채 몇 년이 흐르자 성한 이는 모두 빠지고 당뇨 등 성인병까지 얻었다.

노숙생활을 시작한 2006년 이후 돈을 보태주던 세 동생도 몇 년 전부터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 아이들(동생들)도 힘들겠죠. 그런데 자꾸 도와 달라고 하니…. 아내와 딸에게도 연락하지 않습니다. 재기한 뒤 (모두에게) 연락할 겁니다.”

 

2

 

7개월 영농교육 받고 창고·경작지 임대받아

벌써 떠돌이생활 7년째다. 그렇게 역사(驛舍)·판자촌·고시원 등을 전전하던 이씨에게 지난해 2월 한줄기 빛이 찾아들었다.

영등포의 한 자활시설을 통해 알게 된 서울시 영농 프로그램이었다. 7개월간의 교육과정을 수료한 이씨는 경북 예천시로부터 몸을 누일 공간과 외양간·창고용지로 150평, 경작지 100평을 임대받았다.

“초기 지원금으로 받은 200만원을 씨앗·농기구 등을 사는데 쓰고 나니 남은 돈이 없어 걱정되기도 해요. 그렇지만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요. 이를 놓칠 수는 없죠.”

공무원에서 노숙자로 전락한 뒤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이씨는 이제 다시 농부로 재기하겠다며 의지를 다진다. 그는 “모든 것은 봄이 돼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거칠어진 손가락을 모아 쥐었다.

“다시 한번 개척해야죠. 내 삶을 준비해야 하니까요.”

‘풍찬노숙’에 다 빠지고 몇 개 남지 않은 앞니를 드러내며 이씨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글·김의진 (뉴스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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