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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누구나 성장과정에서 악에 끌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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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 <스토커>는 2월 28일 국내개봉 전부터 숱한 화제를 뿌렸다.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제작을 맡고,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석호필 역을 맡았던 웬트워스 밀러가 시나리오를 썼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특히 미아 와시코브스카·매튜 구드·니콜 키드먼 등 할리우드 명배우들의 참여로 이목을 끌었다. 말하자면 <스토커>는 박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합이다. 그 총합은 박 감독만의 영화적 미학으로 완성됐다.

<스토커>는 낯익은 스토리텔링을 유려한 미장센으로 승화시킨 빼어난 수작이다. <스토커>에는 박 감독이 천착해 왔던 ‘복수’의 텍스트, (전작에 비해 수위와 강도는 다소 얌전해졌지만) 잔혹한 비주얼, 선과 악의 모순을 담은 철학 등이 유유히 흐른다.

굳이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박 감독의 전작에 비해 더 우아하고 세련된 영상이다.

날 선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 박 감독의 ‘복수 3부작’이 거칠고 투박했다면, <스토커>는 절제된 화면 안에서 밀도 있게 이야기를 풀어가며 소녀를 관조한다. 마치 정교하게 세공한 보석을 감상하는 느낌이다. 박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10대 후반 소녀의 요동치는 심리와 불균질한 행동을 저릿하게 묘사한다.

<올드보이> 이후 세계 영화계에 존재감을 각인시킨 박찬욱 감독은 할리우드로부터 꾸준히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면서 기회를 잡았다. 결국 그를 매료시킨 이야기는 ‘소녀의 성장통’이었다.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의 소녀적 감수성, 사춘기적 반항심을 통해 성장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로 그렸어요. 사춘기 때는 어른들의 세계를 속물스럽다고 생각하면서 혐오하고 경멸하잖아요? 하지만 동시에 낭만적이고 우아하다고 생각하죠. 그런 마음을 잘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박 감독이 <스토커>의 시나리오에 끌린 점은 바로 ‘여성(소녀)의 이야기’가 매혹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박 감독에게 여성은 미지의 존재이자 탐구의 세계인 셈이다.

박 감독이 <스토커> 연출을 결심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자신의 외동딸과 연관이 있다. 박 감독의 외동딸은 극 중 인디아와 동갑이다. 극 중에서 찰리(매튜 구드)가 사온 와인은 ‘1994년 산’인데, 이 대목은 딸과 인디아의 나이가 같다는 점을 상징한다.

“젊은 시절에는 남성적 세계를 지향했습니다. 마초라기보다 남성의 특징에 더 끌렸습니다. 그런데 점점 여성적인 면이 생기고 또 결혼생활이 길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여성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여성성은 때로는 잔인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리석기도 하죠. 어쨌든 여성성에 매혹된 것은 사실이에요.”

<친절한 금자씨> 이후 여성의 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그의 작품세계에서 <스토커>는 그 정점에 선 영화라고 할 수 있다.

10대 소녀는 성장통을 겪는다. 그 과정은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반항심이 생기고 나쁜 행동에 매혹된다.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

<스토커>는 ‘소녀의 성장통’이라는 텍스트를 박 감독 식으로 해석한 이야기인 셈이다. 말하자면 소녀의 성장통에 대한 잔혹한 비유다. 그 대표적 장면이 인디아가 살인을 저지른 찰리의 ‘악마적 모습’을 목격한 후 샤워를 하며 자위하는 모습이다.

 

“성적 자각하면서 어른과 여자 되는 순간 체험”

“성인이 되는 순간이죠. 성적 자각을 하면서 어른이 되는 순간을 체험하는 것 아닐까요? 그 순간은 여자가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위행위가) 폭력행위에서 느끼는 희열과 분간할 수 없다는 거죠. 그것은 죄악 자체에 대해 느끼는 사춘기 시절의 열정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 제 생각이고요. 물론 이 영화가 ‘살인이 어른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웃음) 이 영화 전체를 커다란 비유로 봤을 때 악에 끌리는 마음, 그런 과정을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겪는다는 것이죠.”

할리우드에 박 감독은 신선한 피다. 한 해 수백 편의 영화를 기획 제작하는 할리우드는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원한다. 늘 새로운 수혈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박 감독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가주의로 할리우드를 매혹시키고 있다. SF 고전인 <블레이드 러너> <프로메테우스> 등 세기의 걸작을 만든 리들리 스콧 감독이 러브콜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다.

 

“할리우드 시스템은 개인 역량 끌어내는 신세계”

또 <올드보이>는 스파이크 리 감독이 리메이크로 다듬는 중이다. 박 감독이 제작을 맡고 봉준호 감독이 연출하는 <설국열차> 역시 할리우드 배급망을 타고 전 세계에서 개봉될 전망이다.

“할리우드에서의 작업을 통해 감독의 논리가 정교해지고, 내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게 됐어요. 왜 그런 것 있잖아요? ‘나는 이것을 원해’라고 한 번 말하면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논쟁을 벌이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이 그게 아니었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거든요. 자기의 논리가 빈약해지면 양보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길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이 이길 때도 있고 또는 제3의 누군가가 맞을 때도 있어요. 그 과정이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차츰 좋은 결과를 만들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논쟁하거나 설명하는 과정을 피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스토커>의 미학적 완성도는 대단히 높은 수준이다. 여기에 박 감독은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뽑아내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사실 감독으로서는 유럽이나 아시아 현장이 훨씬 편해요. 미국의 현장은 스튜디오와 많은 대화를 하는데, 꼭 그게 나쁜 것 만은 아니에요. 감독이 누군가와 성의를 다해 대화하고, 설득하고, 논쟁하는 과정이 고달프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 때가 많더라고요.”

그리고 지금, 박 감독은 치밀하게 설계한 영화작업을 겪으며 ‘협의와 이해’라는 가치를 통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또 다른 장을 써가고 있다.

글·지용진(무비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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