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엊그제 또 제사 지냈어?”
“언니는 그 많은 제사음식 어떻게 다 준비해? 우리 시댁은 제사를 안 지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지난 9월 초 부산 해운대구의 한 가정집,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오는 거실에 다섯 자매가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까닭에 그들의 수다는 그칠 줄 모른다. 시댁 식구 이야기며 명절음식 장만 걱정까지 누가 들어봐도 여느 한국인 며느리들의 대화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점이 있다.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품새로 보아선 영락없는 한국 아줌마지만, 이들은 모두 남미 페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자매들이다. 큰언니 메체(47)부터 넷째 루스마리아(38), 다섯째 수산나(35), 여섯째 엘다(33), 여덟째 안나(28), 아홉째 앙헬리카(26)까지 아홉 명의 자매 중에 여섯 명이 모두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스무 시간가량 걸리는 페루는 우리에게는 ‘잉카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거리로 보나 문화로 보나 페루는 그리 가까운 나라가 아니다. 여섯 자매의 생각도 비슷하다.
14년 전 한국으로 처음 시집온 다섯째 수산나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평소 아시아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페루의 한국 식당에 손님으로 온 한국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머나먼 나라로 시집오면서 처음엔 두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정 많은 한국 사람의 문화에 푹 빠져버렸다. 무엇보다 페루 남자보다 자상한 남편에게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언니와 동생들을 하나둘 한국으로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섯 자매가 한국으로 왔다.
이들의 고향은 페루 수도 리마에서 자동차로 스무 시간이 걸리는 산골 마을이다. 이들 자매의 가족은 그곳에서도 소문난 ‘딸 부잣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열세 남매 중 네 명은 병으로 먼저 세상을 뜨고, 아홉 자매만 남았기 때문이다.
여섯 자매는 모두 경상도 남자와 결혼했다. 무뚝뚝하기로 이름난 경상도 남자들이지만, 이들 자매에겐 책임감 강하고 정 많은 ‘1등 신랑감’들이다. 메체와 안나·앙헬리카는 포항, 루스마리아와 수산나는 부산, 엘다는 대구에 산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책임감 강한 1등 신랑감!
이날은 얼마 전에 아이를 출산한 여섯째 엘다를 뺀 다섯 자매가 모였다. 한 달 전 이사 온 넷째 루스마리아의 집들이 겸해서다. 명절을 앞두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추석 음식에 관심이 모아졌다. 처음 명절을 쇨 때만 해도 우왕좌왕했지만, 이제는 제법 한국 음식을 만들고 제사상 차리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처음엔 제사를 지내는 게 익숙하지 않았어요. 생선과 고기의 위치부터, 과일 종류까지 외워야 할 게 한두 가지여야죠.” 넷째인 루스마리아가 말을 이었다.
“한국은 ‘지짐’(전)을 많이 해먹잖아요? 그런데 지짐을 하는 데 손이 참 많이 가요. 온종일 앉아서 부치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데요. 그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죠. ‘페루처럼 튀김을 해먹으면 좋을 텐데’라고요.”
다섯째 수산나가 거든다. “저는 호칭이 진짜 어려웠어요.
시누이가 두 명인데, 둘 다 이미 결혼했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시누이를 ‘아가씨’라고 부르잖아요. 처음에는 결혼한 아줌마한테 왜 ‘아가씨’라고 부르나 싶었죠. 믿기 힘들어 국어사전까지 찾아봤다니까요(웃음).”
맏언니 메체는 한국에 와서 처음 맞은 명절에 한국 음식을 준비하는 게 서툴러 시댁 어른들에게 페루식 스파게티를 대접해야 했던 해프닝을 들려준다. “한국 음식 반, 페루 스파게티 반 이렇게 준비했는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시댁 어르신들이 페루 스파게티를 아주 좋아해 주셨어요. 참 다행이었지요.”
문화가 같은 한국 며느리들에게도 ‘고부 갈등’은 피해 가기 어려운 벽이다. 그런데 문화도, 언어도 다른 이들에게는 오죽했을까? 그런데 이들은 의외로 고부 갈등을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시집오자마자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는 수산나는 오히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덕분에 한국어를 금방 배울 수 있었다고 미소를 지었다.
“온종일 어머니랑 시간을 지내다 보니 어머니 말투를 그대로 닮아가요. 지금도 대화하다 할 말이 생각 안 나면, ‘뭐라해야카노’라고 말하는 게 습관이 됐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꼭 그러시거든요. 한국에 왔으면 한국문화에 맞추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시어머니께도 마찬가지예요. 어머니의 취향에 맞추다 보니 어려울 일이 없죠. 오히려 지금은 엄마같이 편해요.”
이번 추석도 자매들은 각자의 시댁에서 어김없이 한국 며느리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페루에서 온 다섯 며느리는 이구동성으로 “우리 사전에 명절증후군은 없다”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글·백승아 객원기자 201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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