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교래곶자왈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지금의 탐방로가 생기기 전 일이다. 소가 풀 뜯으러 다니던 길을 따라 소처럼 느릿느릿 안개비 속을 걷던 중이었다. 갑자기 길이 사라졌다. 몇 시간을 헤매도 빙빙 돌아 제자리. 지척에서 노루가 악을 쓰고 해는 저물었다. 덤불을 뚫고 간신히 숲을 빠져나가 처음 만난 것은 다름 아닌 소떼였다. 풀을 뜯다 이동하던 수십 마리 소떼가 이쪽을 향해 일제히 걸어오고 있었다. 겁먹은 소들과 서로 눈치를 보다 잠시 후엔 나란히 걸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곶자왈에서는 마을토박이도 길을 잃는다는 것을 모르던 여러 해 전 봄날이었다.
그때의 두려움과 경외감·미안함이 채 잊히기도 전, 이제는 매끈해진 탐방로를 걷는다. 교래곶자왈에 자연휴양림이 생기면서 탐방로도 함께 생겼기 때문이다. 휴양림은 교래곶자왈에 나 있던 우도(牛道)를 다듬어 ‘생태관찰로’로 꾸몄다. 누구나 이 길을 따라 편안하게 걸으며 위태롭고 척박해서 더 아름다운 곶자왈을 경험할 수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최소한의 훼손으로 곶자왈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 분명 좋은 일이다.
허나, 이제 더 이상 길을 잃을 일은 없지만 길을 찾을 필요도 없어졌으니… 애타게 길을 찾을 ‘길’도, 그러면서 참 작고 하찮은 나를 발견할 ‘길’도 없어졌다. 아쉽다. 하지만 이 길이 더 미끈해지기 전에, 아직은 충분히 순결한 숲의 숨을 느끼러 간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모든 것의 숲
동백은 모가지째 툭 떨어져 기적처럼 바위틈에 걸려 있다. 오늘 떨어진 것은 붉고 그제 떨어진 것은 검붉다. 열흘 전 지나간 비바람이 떨군 것은 이제 거의 흙빛이다. 숲을 뒤덮은 이끼는 새순처럼 푸르다. 검은 하늘 은하수처럼 검은 섬 숲에 떨어져 빛이 난다. 세상이 눈밭이 되든 물바다가 되든 언제나, 돌마다 바위마다 나무 밑동마다 번져나간 이끼는 낮은 곳의 주인이다. 비 내리는 날 이끼는 오늘 처음 세상에 나온 것처럼 순결한 초록이 된다.
온 땅이 따뜻해지는 봄날, 무릎을 꿇어야 겨우 보일 만큼 작은 풀들은 발 디딜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무심코 걷다 그 어린풀들이 얼마나 많고 많은지 보고야 만다면 선 채로 그만 당혹스러워진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중대한 선택이 된다. 교래곶자왈은 곶자왈 중에서도 희귀식물이 많아 더욱 귀한 숲이다.
교래곶자왈에서는 섬사철난·한라돌쩌귀·새끼노루귀·변산바람꽃·금새우란·큰천남성 같은 다양한 풀들을 만날 수 있다.
노박덩굴·송악·마삭줄·으름덩굴·개다래·멀꿀 같은 덩굴나무들은 씩씩한 생명력으로 나무와 나무 사이에, 숲의 하늘에 다리를 놓는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낙엽활엽수들은 꽃이 지는 시절이면 숲길을 꽃길로 만들어놓는다. 무엇보다 일색고사리·나도히초미·십자고사리·큰톱지네고사리·관중 등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양치식물이 숲 전체에 군락을 이룬다.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노루가 “껑껑껑”과 “아아악”의 중간쯤 되는 특유의 소리를 내며 돌아다닌다. 그리고 저 멀리서 그 유명한 궁둥이를 슬쩍 보여주곤 사라진다. 물론 어떤 날은 서로 눈이 맞는다. 처음 들으면 몸서리가 쳐질 만큼 신경질적인 소리와 달리 노루는 겁이 많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잠시 경계하다 이내 몸을 휙 돌려 껑충껑충 도망간다.
숲에서 우리는 서로 놀란다. 노루도 그렇고 소떼도 그렇고 꿩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모두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곶자왈에 존재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돌·바람·안개·비는 서로 비켜주고 덮어주고 품고 흐르며 숲의 세계를 이룬다. 곶자왈은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모든 것의 결정체다. 비 내려 숲이 한껏 물을 품은 날, 나와 똑같이 숨을 쉬는 존재들에 물처럼 섞여 숲의 한 조각으로 스며들어도 좋겠다.

교래곶자왈을 걷는 몇 가지 방법
교래곶자왈 탐방로는 교래자연휴양림 안에 조성되어 있다. 탐방로로 들어가려면 휴양림 매표소에서 어른 한 명당 1,000원의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탐방로 입구 직전 곶자왈체험관이 있다. 쾌적한 공간에서 쉬운 설명으로 곶자왈을 접할 수 있으니 걷기 전 예습 삼아 둘러보는 것도 좋다.
탐방로에는 짧게 걷는 생태관찰로와 길게 걷는 오름산책로가 있다. 생태관찰로는 왕복 40분 거리, 별다른 오르막 없이 쉬엄쉬엄 산책하며 걸을 수 있다. 길의 시작과 끝 일부 구간만 겹치고 나머지 구간은 곶자왈을 둥글게 한 바퀴 돌게 된다. 오름산책로는 왕복 2시간30분 거리, 시작 지점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큰지그리오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왕복 7킬로미터 코스다.
선택은 걷는 자의 몫이다. 오름산책로를 택하면 숲과 목장, 오름을 두루 지나게 돼 제주의 다양한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 생태관찰로로 방향을 잡는다면 편안한 길을 따라 느긋하게 걸으면서 곶자왈을 더 촘촘히 느낄 수 있다.
교래곶자왈을 경험하는 또 다른 방법도 있다. 건너편의 테마파크 에코랜드에서 기관차를 타는 방법이다. 이것은 걷느냐 타느냐의 차이기도 하지만 입장료 1,000원과 1만1,000원의 차이, 무엇보다 ‘스며들기’와 ‘구경하기’의 차이기도 하다. 물론 테마파크에서는 군데군데 만들어놓은 역마다 내려 산책도 할 수 있고 곶자왈을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테마파크 안에 곶자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곶자왈에 테마파크와 골프장이 세워진 것이니. 그것은 휴양림도 마찬가지다. “에코랜드에서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무한한 혜택을 누려보세요”라고 기관차는 정답게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에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쨌든 이 선택 역시 여행자의 몫이다.

비 많고 물 맑은 교래리의 허파
다시 숲길로 돌아와 천천히 걸어보자. 다른 곶자왈처럼 이곳 역시 숲 바닥은 돌투성이다. 크고 작은 돌이 불연속적으로 쌓여 만든 틈은 서로 다른 깊이와 높이, 넓이를 이룬다. 돌과 돌 사이 무수한 틈에서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공기가 나와 곶자왈 속은 1년 내내 온도 변화의 폭이 크지 않다. 이는 일색고사리 같은 온대성 식물과 나도히초미 같은 난대성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환경조건을 만든다.
숲을 걷다 보면 가끔 눈앞의 풀은 바람에 흔들리는데 몇 발짝 옆의 것은 미동도 않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바로 곶자왈의 숨골 때문이다. 숨골은 땅속 깊이까지 계속되는 돌 틈이 만든 지하통로다. 숨골에서 바람이 나오면 입구의 풀이 흔들린다. 또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도, 겨울이면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숨골입구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비가 오면 숨골은 빗물을 땅속으로 내려보내는 통로가 된다. 곶자왈 곳곳에 산재한 숨골은 제주의 지하수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래곶자왈이 있는 교래리는 ‘제주삼다수’를 생산하는 지역이다. 제주삼다수는 화산암반수의 이름으로 전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생수 브랜드가 된 지 오래다. 제주인들은 식수가 개발되기 전, 물을 찾아 용천수가 나오는 해안에 마을을 이루고 허벅(물을 길어 나르는 동이)으로 물을 길어다 먹으며 살았다. 요즘이야 육지나 제주나 별다를 바 없는 식수 상황이라지만 척박한 제주에서 퍼올린, 흔하디흔한 그 생수를 마실 때면 미안해진다.

사라지는 숲, 잃어버린 이야기
제주도는 한라산을 기준으로, 동서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곶자왈은 이 동서 방향을 따라 서부의 한경-안덕곶자왈지대와 애월곶자왈지대, 동부의 조천-함덕곶자왈지대와 구좌-성산곶자왈지대 등 4군데에 형성돼 있다. 이 4군데 곶자왈지대는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다. 나무와 풀의 종류, 고도나 습도 등에 따라 어디는 봄꽃이 많고 어디는 새순이 곱고 어디는 상록 거목이 울창하다. 특징에 따라 걷기 좋은 시기도 모두 다르다.
교래곶자왈은 지난 ‘숲으로 가는 길’에서 소개한 ‘동백동산’과 함께 동부의 조천-함덕곶자왈지대에 속한다. 그러나 상록활엽수로 빽빽한 동백동산과 달리 낙엽활엽수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양치식물들이 살아나는 5, 6월이면 교래곶자왈은 숲 바닥부터 키 큰 나무까지 풍성하게 부풀어오른다.
곶자왈지대 4곳의 면적을 모두 합치면 현재 제주도 전체 면적의 6퍼센트를 차지한다. 대부분 해발고도 200~400미터 내외의 중산간지역이지만 해안까지 광범위하게 이어진 곳도 있다. 거친 가시덤불과 돌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서 땔감을 얻거나 고사리를 캐고 숯을 굽고 마소를 먹이는 데 이용되었다. 제주 어느 곳도 피해갈 수 없었던 4·3사건 때에는, 곶자왈은 그 속의 용암동굴로 인해 곳곳에서 주민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최근 개봉한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에도 곶자왈과 용암동굴이 등장한다. 제주4·3사건을 다룬 영화는 당시 동광리 주민 120여 명이 숨어 지내던 큰넓궤(동굴)와 주변 곶자왈 등을 주요 배경으로 한다. 큰넓궤는 한경-안덕곶자왈지대에 속하는 동굴로, 동광리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실제로 50여 일 동안 살았던 곳이다. 굳이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곶자왈은 이미 지난 시간 수많은 제주인의 삶과 죽음을 목도해온 제주의 역사이자 문화이다.
안타까운 일은 제주의 생태와 역사·문화·생활사 등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곶자왈이 무분별한 개발로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이다. 숲을 허문 자리에는 골프장과 채석장, 관광시설 등이 들어서고 있다. 한번 허물어진 용암지대는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가 없다. 곶자왈 훼손이 더 안타까운 이유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도 좋지만, 숲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두 발로 곶자왈에 소중한 걸음을 하길 바란다. 더 많은 곶자왈이 더 오래 지켜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곶자왈은 단 한 번의 경험이면, 누구라도 그것을 지키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글과 사진·이꽃리 (숲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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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