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인사합시다’ ‘자신이 마실 차는 스스로 준비합시다’ ‘지나친 반말이나 하대를 하지 맙시다’.
한국전력이 지난 5월 7일 전 직원의 아이디어를 모아 발표한 ‘권위주의 타파 14계명’ 중 일부다. 일상생활과 관련한 이런 내용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어린이들이 배우는 ‘배꼽인사’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물론 ‘폭탄주, 잔 돌리기 등을 타파합시다’ ‘일을 모두 마치면 눈치 보지 말고 퇴근합시다’ 등 직장인이라면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내용도 담겨 있다.
최근 라면상무, 빵사장, 욕우유 사건 등이 터지면서 권위주의 문화의 극단을 보여주는 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자 갑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 문화 청산을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제도적으로 갑이란 용어가 사라지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5월 13일 표준근로계약서에서 사업주, 근로자를 의미하는 ‘갑’과 ‘을’ 단어를 삭제하고, ‘사업주’와 ‘근로자’로 바꿔 보급한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5월 16일부터 건설공사나 용역, 물품 등에 대한 각종 계약서에서 ‘갑’ ‘을’이라는 용어 대신 ‘수요자’ ‘공급자’ ‘매도인’ ‘매수인’ 등으로 표기한다.
민간 기업에서도 자성이 잇따르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5월 10일부터 협력사와의 모든 거래계약서에 ‘갑’과 ‘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이와 함께 매월 온·오프라인에서 ‘올바른 비즈니스 예절’ 강좌를 열고 협력사와 소통을 강화키로 했다.
롯데백화점은 5월 중 본사와 협력사 직원이 서로의 역할을 바꿔보는 ‘롤플레잉 교육’을 한다. 협력사의 고충을 이해하고 소통을 확대하기 위해서다.
무례하고 도를 지나친 ‘갑질’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을의 분노’가 들끓고 있는 상황은 한국공정거래조정원 접수 창구에서도 느낄 수 있다.

“공생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인 경제성장·안정 어렵다”
한국공정거래조정원은 올 들어 1~3월 사이에 총 398건의 분쟁조정 사건을 접수받아 이 중 368건의 사건을 처리했다.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접수 건수는 44퍼센트, 처리 건수는 35퍼센트 증가했다.
분야별 접수 증가 내용을 살펴보면 ▶하도급 분야 65퍼센트 ▶공정거래 분야 35퍼센트 ▶대규모유통업거래 분야 17퍼센트 ▶가맹사업거래 분야 11퍼센트 순으로 증가했다. 특히 분쟁조정상담·콜센터는 1,450건을 상담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민원 상담이 무려 225퍼센트나 증가했다.
한국공정거래조정원 정연홍 대외협력팀장은 “특히 하도급 분야 사건 수가 큰 증가율을 보였는데, 이는 건설업계 전반이 어려워짐에 따른 하도급 분쟁의 급증과 공정거래위원회 산하기관인 한국공정거래조정원에 대한 신뢰도 증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사실 부정적인 ‘갑을 문화’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인’ 한 중소기업 사장은 지긋한 나이에 청년층 인기브랜드인 갭(GAP) 의류를 즐겨 입는다고 했다. 옷이라도 ‘갑’을 입자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라면상무 사건 등등이 터지면서 인터넷을 검색하니 몇 년 전에 들은 ‘옷이라도 갑’ 이야기도 알고 보니 일그러진 갑을 문화를 풍자하는 농담의 하나로 회자되고 있었다. 이런, ‘옷이라도 갑’이 ‘엄친아(엄마 친구의 아들)’처럼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듯하지만 실제 아는 사람의 이야기었던가.
계약서에서 비롯된 갑을 관계는 흔히 경제적 관계에서의 강자와 약자를 빗댄 표현이다. 사실 따지자면 어디 갑을 뿐인가. 더 약자인 ‘병’도 있고, ‘정’도 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4월 8~12일까지 7대 브랜드의 프랜차이즈 미용업체들을 대상으로 스태프 종사자의 근로시간, 임금수준 등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최저임금 미달 지급 업소가 11곳(26.8퍼센트)이었다. 미용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108만원 수준이었고, 근로자 평균 근속시간은 3.7개월로 조사됐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도 가맹본부 앞에서는 을이지만 이보다 더한 을이 또 있는 것이다.
경제적 관계에서만 갑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관계, 세습적 관계에서인 가족·부부 등의 관계에도 강자와 약자는 늘 존재한다. 또한 영원한 갑도 없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88만원 세대가 전 세계의 화두로 등장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생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는 경제성장과 안정도 어렵다는 의식이 확산돼왔다. 우리나라는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공동체 지표가 낮고, 집단 간의 관용성은 더욱 낮으며, 행복감 역시 바닥권이다. 이런 가운데 발생한 예의 없는 갑들의 사례는 공생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서로 다른 경제적 지위에서 오는 갑을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서는 갑이 먼저 자세를 낮추고, 갑이란 용어가 사라지도록 기본예절을 다시 찾아야 한다. 이러한 표면적 변화도 필요하지만 누구나의 마음속에 있는 갑의 자세를 지우고 을의 입장에 서보는 역지사지의 자세, 그것이 잘못된 갑을 문화를 바꾸는 진정한 출발일 것이다.
글·박경아 기자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