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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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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 / 서성이는 / 초라한 인생 / 기다리는 이 / 있는 것도 아닌데 / 고향 그립다
주소는 없지만 / 가슴에 맴도는 / 백삼십-삼십 / 떠도는 / 난수표로 / 펄럭인다 (김경식 시인의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 중에서)

시인 김경식(58) 씨가 책과 친해진 계기는 오랜 타향살이였다.

결혼하기 전 13년 동안 프리랜서로 일하며 국외에 머물러 있었다. 아프리카·동남아·중동·유럽 등지의 여러 나라를 전전한 탓에 언어는 늘 낯설었다. 말하기도 읽기도 힘든 와중에 눈에 띈 것이 책이었다. 그는 한국 사람을 만날 때마다 “책이 있으면 좀 놓고 가라”고 청했다.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은 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때부터 어디서든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됐다. 그렇게 읽은 책만 해도 5만여 권. 지금도 한 달에 수십 권을 읽는 ‘독서가’다.

타향살이를 할 때 김 씨가 느낀 감정은 그의 시집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래서 책은 그에게 ‘젊은 날의 기록’이다. 시인은 책으로 빼곡한 책장에서 시집 한 권을 뽑아 건넸다. 살구빛 표지의 시집 제목은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 네덜란드에서 타향살이하던 시절, 그는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라는 사람을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시를 썼습니다. 시는 넋두리에서 시작되거든요. 조선시대에 귀양 간 사람들이 책을 많이 남긴 이유도 그렇습니다. 외로워서 미칠 것 같고 그런 감정을 책으로 남긴 것이죠. 그래서 유배문화 덕분에 문학이 꽃피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때 남긴 첫 시집을 보면 유치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하지만 처음 쓴 시라서 생각과 이상이 가장 순수한 것 같습니다.”

몇 번이나 버리려 했던 부끄러운 습작들이 많았지만, 향수를 달래준 고마운 시였기에 책에 담았다.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 ‘편지’, ‘빈방에서’ 등 당시 시인이 쓴 시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다. 읽는 이에게도 그런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1989년 첫 시집을 펴낸 이후 지금까지 6권의 시집이 나왔다.

김 씨와 그의 아내 이주원(48) 씨의 인연을 맺어준 것도 책이다. 김 씨와 이 씨는 경기 동두천의 시인 부부다. 동시를 쓰는 이씨는 중학교 때부터 책 읽기를 즐겼다. 특히 동화를 좋아했다. 이씨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남편도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역 모임에서 김 씨를 처음 만나 사랑을 키우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 같은 시인이라 말이 참 잘 통했다.

아기 밤송이가 / 엄마 나무에게 / 왜 가시를 만들어요? / 너희들을 보호하려고 만든단다
밤송이는 칭얼댄다 / 바늘 가시가 싫다고 / 너희들을 지키려는 / 엄마의 마음이야
(이주원 시인의 ‘밤송이’ 중에서)

이 씨에게 책은 ‘희망’이다. “지금도 동화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래서 사실 동화책은 어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죠. 힘들 때 말을 통한 위로를 받는 것도 좋지만 책을 보고 살아갈 희망을 얻을 때가 많거든요. 동심으로 돌아가 어린 시절을 되새기면 역경 앞에서도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너그러워져요.

웃음도 나오고 마음이 순수해진달까요.” 희망을 주고 싶어서 동시를 쓰는 시인이 됐다. 등단한 지 어느덧 15년이 넘었다.

부부는 책을 좋아할 뿐 아니라 책 읽기를 전파하는 데에도 적극적이다. 동두천에서 찻집 ‘한다원’을 시작한 것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김 씨는 “누구나 찾아와 함께 책을 읽고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손님들에게는 보이차를 무료로 내어준다. 한 권에 500원만 받고 책을 빌려주기도 한다. 이 씨는 “요양원에 계신 분이 매번 책을 빌려가기에 사연을 물었더니 노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읽어준다고 했다”며 “책을 읽어주면 노인들의 뇌가 퇴화가 덜 된다는 말에 뿌듯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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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로 많은 책 버린 뒤 나눔 통해 3만여 권 기증

찻집은 지역 문인들이 작품을 나누는 공간이기도 하다. 동두천 지역의 시인, 소설가, 희곡작가 등이 활동하는 ‘이담문학회’의 회원은 부부를 포함해 50여 명이 넘는다. 이 지역에 살고 18세 이상의 성인이며 글쓰기를 좋아하면 자격이 생긴다. 회원들은 주기적으로 찻집에 모여 서로의 작품을 읽고 소감을 이야기한다. 발표된 작품들은 1년에 한 번씩 책으로 만든다. 1994년 만들어진 이래 모두 29권의 책을 펴냈다.

지역의 아이들을 데려다 책을 읽히고 독후감을 쓰게 하는 것도 부부의 몫이다. 책을 가까이하고 사고력을 키우도록 돕기 위함이다. 이 씨는 “글을 모르는 어린아이들도 그림책을 보면 느낀 점을 술술 이야기한다”며 “어렸을 때부터 책을 친구처럼 여기며 읽고 느낀 점을 쓰게 하고 싶어 시작했다”고 말했다. 실제 부부는 그들의 두 자녀가 잘못을 했을 때에도 독후감을 쓰라고 할 만큼 책 읽기를 강조했다. 독서를 체득한 덕분에 두 자녀도 부부처럼 문학인이 되었다. 큰아들은 시조를, 작은아들은 희곡을 쓴다.

교도소, 경찰서, 학교 등 책이 필요한 곳곳에 책나눔을 실천한지도 오래됐다. 김 씨는 “여름 홍수로 1만여 권의 책을 버린 후 책나눔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기증한 책만 해도 3만여 권이 넘는다. “몇 권 가져가시라”며 책을 내미는 부부는 진정한 ‘애서가’였다.

글·남형도 / 사진·원동현 기자 201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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