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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나에게 책은 OO이다 “과학소설은 미래로 가는 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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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스릴러, 판타지, 공포, 로맨스 등 소외됐던 ‘장르 문학’이 점차 기지개를 켜고 있기는 하지만 국내 출판시장에서 그 영향력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특히 SF(과학소설·Science Fiction)는 신진작가의 등단 기회마저 적다. 2000년대 중반 개최되던 ‘과학기술 창작문예’도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SF 문학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이 있다.

2007년 첫선을 보인 장르 문학 전문지 <판타스틱>의 편집장과 SF문학 출판사 오‘ 멜라스’의 대표를 역임하며 작가들의 출간 기회를 마련했고, 한국 SF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젊은 세대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펼치고 있는 박상준(48) 서울SF아카이브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박 대표는 자신의 직업을 ‘SF 및 교양과학 전문 기획번역가’라고 소개했다. 상당히 긴 이름의 직업이었지만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한번에 알 수 있는 소개였다. 그는 마치 고대의 보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 같다. 한국어로 된 모든 SF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은 자료만 해도 책·만화·영화 등 1만여 점을 넘어선다. 단순히 수적으로만 많은 것이 아니라 희귀 자료가 많은 까닭에 이 자료들로만 2007년 ‘한국 과학소설 100년 기념 전시’를 열 정도였다.

그의 컬렉션은 구한말 들어온 최초의 우리말 SF 번역소설부터 최근 영미권에서 유행하고 있는 SF, 판타지, 일반 문학 등이 뒤섞인 새로운 장르 문학인 슬립 스트림(slip stream : 고속으로 운동하는 물체의 뒤에서 기류가 흐트러지는 현상) 작품까지 시대를 뛰어넘어 한글로 나온 SF 자료는 모두 모으고 있다. 20여 년 이상 국내는 물론 해외의 헌책방을 뒤져 국내 최대의 독보적인 자료를 갖췄다고 한다. 박 대표는 “개인 소유를 넘어 공공재산으로 활용하고자 목록작업을 서두르고 있다”며 “기회가 마련되면 상설 전시관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어떤 매력에 이끌려 SF문학에 빠져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박상준 대표는 두 번의 ‘임팩트(impact)’ 덕분이라고 말한다. 초등학교 시절 책 읽기를 좋아하던 그는 특히 SF소설에 심취했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어린이용으로 각색된 SF소설에 흥미를 잃어갔다. 단순한 과학정보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단순함에 질린 탓.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성인용으로 완역된 아서 클라크 <지구 유년기 끝날 때>를 읽고 경이로움을 경험했다.

“심오한 철학, 시야의 확장 등 소설 한 권으로 인해 제 생각이 완전히 뒤바뀌었죠. 사춘기 시절이라 그런지 감성이 폭발했다고나 할까요. 그때부터 과학소설을 탐독하기 시작했죠. 미래로 가는 나침반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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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 작가의 출판을 도왔다는 점이 가장 큰 기쁨

하지만 이 열정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읽고 싶어도 읽을 책이 없었다. 워낙 많은 책을 읽다 보니 대학생이 될 때쯤에는 이미 안 본 책이 없을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원서들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대학가 헌책방에서 SF 원서는 인기가 없는 대표적인 분야였다고.

“대학생이 된 뒤의 SF 독서에서 또 한번 충격에 빠졌습니다.

해외에서는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같은 책을 SF로 본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말이죠. ‘아, SF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넓구나. 이 좋은 작품들을 나 혼자 본다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아쉽기도 하구나’ 하고 안타까워했답니다.”

박 대표는 그때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헌책방을 드나들며 알게 된 지인으로부터 단행본 번역을 의뢰받아 본격적으로 SF 번역을 시작하게 됐다. 따지고 보면 한국 최초의 SF 역시 번역서로 시작했다. “1907년 재일유학생 잡지인 <태극학보>에 연재된 쥘베른의 <해저 2만리>가 <해저여행기담>으로, <인도 왕녀의 5억 프랑>이 ‘철세계’로 번안되어 발표되며 국내 SF 문학의 장을 연 셈이죠.”

한국 최초의 창작 SF로는 김동인의 ‘K박사의 연구’(1929년 <신소설> 12월호)로 추정된다. 인분을 원료로 개발한 대체식량을 둘러싼 이야기다. 이어 ‘천공의 용소년’(허일문, 1930), ‘라듸움’(김자혜, 1933), ‘여신’(방인근, 1939) 등이 발표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갑자기 명맥이 끊겼다. SF소설의 주 소비층인 젊은 고학력층들이 일본어를 배우면서 더 이상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고, 뒤이어 6·25전쟁을 겪으며 해외 소설 수입은 물론 국내 작가들도 집필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명맥이 끊어졌던 한국 SF문학은 1990년대 들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복거일의 <역사 속의 나그네>(1991), <파란 달 아래>(1992), 듀나(이영수)의 <태평양 횡단특급>(2002)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잠시뿐, 2000년대 들어서는 국내 대표 SF 작가들도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평가 아래 인터넷 외에 뾰족한 발표 지면이 없었다.

박상준 대표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자 지인들과 의기투합해 장르 문학 월간지 <판타스틱>을 창간했다. 하지만 얼어붙은 출판계에 장르 문학은 설 자리가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잡지는 다른 출판사로 넘어갔고 그 전에 박 대표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다행히 주변의 도움을 받아 웅진출판의 SF전문 임프린트 브랜드 오‘ 멜라스’를 설립했다.

“김보영, 김창규, 박성환, 배명훈 작가의 소설을 출판하고 올라프 스태플든,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들을 번역하며 출판계의 ‘블루레이크’로 불리기도 했죠. 블루오션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사업성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브랜드 자체가 사라졌지만 그 기간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출판했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제는 잠시 출판계에서 떠나 과학계와 문화계, 교육계를 잇는 ‘융합문화’를 형성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박 대표.

과학단체 강연과 기고 활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SF 관련 자료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만사 제쳐두고 찾아간다고 한다.

“저에게 SF책이란 ‘우주’ 같은 존재죠. 책을 읽음으로써 생각의 나래를 펼쳐 현실의 우주가 아닌 별개의 우주를 탐험한다고나 할까요? 책을 넘기는 순간이 바로 우주로 떠나는 시간이죠.”

글·김상호 / 사진·오상민 기자 201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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