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추석연휴에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오래 전에 구해 놓았던 <객주>를 집어 들었다. 말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 대표 대하소설인 <객주>는 황석영의 <장길산>과 쌍벽으로 조선 민중들의 삶을 웅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 김주영은 원래 아홉 권이었던 <객주>를 30여 년 만에 재집필하여 전 10권으로 완성시켰다. 그게 딱 1년 전인 2013년 9월의 일이다.
1878년부터 1885년까지 보부상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세밀하게 담아낸 소설 <객주>는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한 장돌뱅이 천봉삼을 주인공으로 한 길거리 행상들의 유랑을 따라가며, 경상·전라·충청 삼도에서 근대 상업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피지배자인 백성의 입장에서 근대 역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대하소설의 새로운 전기를 만든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기대 이상이었다. <객주>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세계로 변하여 주춤주춤하던 나를 완벽하게 집어삼켰다. 연휴기간 중 4권까지 단숨에 읽었다. 주막 술국의 더운 기운이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고, 봉놋방의 발고린내가 코를 찔렀다. 못 먹는 것 없고 못 파는 것 없는 물물교환의 복잡다단한 인생살이와, 인사부터가 욕이고 대화를 시작하면 타령으로 달려가는 민중들의 언어세계에 담긴 풍성한 생명력이 너무너무 매력적이었다. 하루 종일 짐을 지고 걸었던 장딴지가 주모와의 ‘밀당’ 수작과 막걸리 두어 잔에 아지랑이 풀리듯 풀리는 모양은 실제로 느껴지는 듯했고, ‘천한 것’들이 짝을 지어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양반들을 후려잡는 장면, 그 외에 심심풀이로 나오는 매타작, 욕타작, 온갖 사기행위의 기기묘묘함과 그 사이를 비집고 연분홍 색채를 뿌리는 토속 로맨스의 은근 짜함은 넘기는 장마다 감탄사가 터져 나오게 만든다.
대대로 전수된 옛말과 속담의 활용, 민간에 유통된 비유와 사설의 구사, 민중 풍속에 밀착된 재담과 육담의 연출이라는 면에서 <객주>를 능가하는 소설은 없다. 신분과 지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인들의 모험, 숱하게 많은 모략과 복수의 이야기는 이 책이 단순히 떠돌이들의 말잔치에 그치지 않고 의협활극, 풍속소설, 구술연희 코드를 다양하게 살린 잘 고안된 작품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뻥이 아니라 한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가 없을 정도다.
문자를 몰라 그들의 삶을 기록하지 못했던 장돌뱅이들은 김주영이라는 뛰어난 작가를 만나 그 삶을 온전히 문자로 돌려받았다. 5년간의 사료 수집, 3년에 걸친 장터 순례, 200여 명의 취재도 엄청나지만 어릴 때 살던 집이 시장에 있었고 담벼락이 따로 없어 장이 서면 방문 바로 앞까지 시장이 들어섰다는 작가의 경험이 핍진한 묘사를 가능하게 했다.
<객주>는 ‘태산은 흙 한 톨이라도 양보하지 않고 황하는 한 줄기의 물도 사양하는 법이 없다’는 중국의 고사를 떠올리게 할 만큼 거대하면서도 세밀하다.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만약 한국적인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산과 물을 건너 장터와 장터를 이어준 이 쇠심줄처럼 질긴 삶과 그것에 반응하는 나의 이 유전자에 있을 것이다.
글 ·강성민(글항아리 대표) 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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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