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엄마, 나는 이제 알았어요.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것을. 난 안 되나봐. 포기해야겠어요.”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온 열세 살 아들이 말했다. 담담한 어투였지만 마치 모든 걸 체념한 듯했다. ‘꿈도 희망도 한창 많을 나이인데 얼마나 지쳤으면….’ 지켜보던 엄마 마음은 무너졌다.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지난날의 추억이다.
서울 사당동에 사는 학부모 이현숙(42) 씨와 아들 탁정원(13)군의 이야기다. 학교생활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방황하던 탁군에게 찾아온 자유학기제의 날들. 그리고 불과 한 학기 만에 아들은 기쁨과 의욕으로 충만한 ‘꿈꾸는 소년’이 됐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보면 절로 신바람이 난다.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눈에 띄게 힘들어했어요. 갑자기 과목 수가 늘고, 한자는 배워본 적도 없고. 우리말을 꾸준히 했어도 우리말로 된 학습용어는 어렵다더군요. 시험문제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고요. 수업을 못 따라가다 보니 학교생활에도 큰 흥미를 못 느꼈던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다던 아들의 놀라운 변신
아들 탁 군은 2000년에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2003년부터 외국에서 자랐다. 남편이 홍콩지사로 발령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부부는 홍콩에서 5년간 지내면서 아들을 QBS(Quarry Bay School)라는 학교에 보냈다. 만 5세부터 가는 학교로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에 해당한다. 영국식 교육 시스템에 기반을 둔 학교였다. 이후 가족은 미국에서 다시 5년을 보냈다.
영국 교육에 ‘쉼표학년제(Gap year)’라는 유사 제도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특수한 교육상황을 반영한 자유학기제와는 다르다.
이 씨는 “두 나라에 있는 동안 아들이 클럽활동이나 봉사활동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아이답게 잘 자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들 학교는 학생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학생들 스스로 적성과 진로를 찾는 데 도움을 줬다.
한국에 귀국한 건 지난해였다. 탁 군은 9월부터 집 근처 동작초등학교에 다니며 한국에서의 짤막한 초등학교 6학년을 마쳤다. 부부는 아들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한국에서 교육받고 자라길 희망했다. ‘한국에서 교육받은 적이 없는데 잘할 수 있을까?’
우려와 달리 아들은 잘 적응한 듯 보였다. 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초반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1학년 1학기 중간·기말고사 성적이 모두 안 좋았다. 외국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받으며 칭찬의 대상이었던 아들은 많이 충격받고 상심했다. 학교에 가는 게 재미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2학기 들어 동작중학교가 자유학기제를 시범운영하면서 탁 군은 180도 달라졌다. 동작중학교는 서울시내에서 첫 시범운영하는 5개 학교 가운데 한 곳이다. 자유학기제가 시작되면서 아들은 친구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며 한층 밝아졌다. 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한테 자랑하는 날이 많아졌다. 자유학기제의 어떤 점이 닫혀 있던 탁 군의 마음을 열었을까.
“자유학기제를 하니까 외국에서 학교 다녔을 때처럼 오후 스포츠활동이 많아졌죠. 음악과 미술까지 예체능 교육이 크게 강화됐어요. 또 학생들 스스로 진로를 탐색하게 하는 취지의 현장체험학습이 늘었어요. 외국에 있을 때는 가보지 못한 곳을 다녀오더니 집에 와서 하루 종일 좋았던 점을 말하곤 했습니다.”
탁 군은 “소방학교에 갔던 일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소방학교에서는 소방관이 양성되는 과정을 체험했다. 투철한 직업정신의 세계에 경외감을 느끼는 한편 소방안전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그간 책으로 여러 상황을 배우기는 했지만 직접 이해하게 된 건 처음이었다.
학부모로서도 학교 측이 자유학기제 시범운영에 많은 공을 들이는 게 눈에 보였다. 각 학급에서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학부모의 근무지를 방문해 체험학습 시간을 갖고, 체험학습 직후엔 설문지로 꼬박꼬박 의견을 물었다.
스트레스를 받던 아들에게 학교 수업에 적응할 충분한 시간적·정신적 여유를 가져다준 것도 자유학기제였다. 자유학기제에서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처럼 점수화하는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 평소처럼 모든 교과목 수업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아이들이 수업을 이해하고 있는지만 확인한다. 이때의 성적 등은 내신에 반영되지도 않아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 자유학기 중의 학업성취도는 고려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진도가 뒤처진 학생이더라도
자유학기제를 거치면서 학습능률을 높여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다. 이 씨는 자유학기제가 아들의 사회성을 기르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자유학기제가 운영되면서 아이들끼리 더 끈끈해졌더라고요. 같이 주말마다 축구를 하러 다니니 협동심이 생기면서 굉장히 친밀해졌더군요. 아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교에 집단 따돌림(왕따)이 없다고 합니다. 선생님들도 면담 때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자율적인 분위기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가져다주나 봅니다.”
현장체험학습 진로 탐색에 도움
탁 군은 자유학기 동안 평소 좋아하던 과학 과목에 한층 관심을 갖게 됐다. 현장체험학습 때 시내에 있는 과학관을 찾는가 하면 틈날 때마다 실험실을 찾아 재미난 실험들을 하고 있다. 아직 어린 나이라 구체적으로 진로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진로를 정하는 데 있어 이런 경험들이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자유학기제는 자신이 어떤 과목을 좋아하는지, 잘하는지, 그 과목이 적성에 맞는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좁은 시설과 열악한 환경, 주입식 일변도의 교육. 이 씨가 한국의 학교들에 가졌던 편견이지만 이제는 많이 해소됐다. 자유학기제가 선진국처럼 아이들이 자유로이 뛰놀고 상상력을 키우게 하면서 저절로 건강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초석이 됐으면 한단다.
“견학을 통해 시야가 넓어지고, 운동하면서 체력을 기르고, 밝아진 분위기 속에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이 될 것 같아요. 여러 면에서 선진국의 좋은 교육풍토와 비슷해진다면 아이들의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결코 낭비가 아닐 겁니다. 내 아이를 ‘공부만 잘하는 이상한 아이’로 키우고 싶지는 않거든요. 요즘 아이들 인성교육 문제가 화두인데 자유학기제가 이런 부분에 기여할 수 있을 거예요. 시범운영 단계에서는 애로점도 있고 아쉬운 부분도 발견되겠지만 선생님들과 학생, 교육계 관계자 분들이 힘을 모아 노력할 때 더 좋은 제도로 발전하리라 믿습니다.”
글·이창균 기자 / 사진·오상민 기자 20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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