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1

 

2‘세종 시대 최고의 동시통역사’ 김하(金何·?~1462)는 세종5년(1423) 문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실록에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세종7년 8월 15일이다. 이조판서 허조가 대언사(代言司)에 와서 곽존중과 논의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공조참의 조숭덕이 사대문서(事大文書·대명외교문서)를 관장하였는데 지금 죽었다고 하오. 뒤이어 맡을 자가 있어야 하겠는데, 이긍·최치운·김하가 이 일을 맡을 만하니, 그동안 맡고 있던 승문원(承文院) 직사는 면제하고 오로지 사대문서에 필요한 중국 이문(吏文)을 습독(習讀)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니, 모름지기 이 뜻을 위에 아뢰시오.”

이문이란 말 그대로 관리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로 한문과는 전혀 다른 문장이었다. 따라서 아직은 통역보다는 번역 쪽의 일을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행실이 반듯하지 못했는지 김하는 세종14년(1432) 예조정랑으로 승진하지만 그해 12월 불법무역을 하다가 적발돼 투옥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장형을 받고 풀려났다. 다음해(1433) 12월에도 김하는 세종의 명을 잘못 전달했다는 이유로 장형 60대를 맞고 의금부에 투옥되는 일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가 형조판서였음에도 불구하고 관리로서의 그의 경력은 그리 순조로운 출발은 아니었던 것이다.

세종은 재위20년 되던 해 신하들과 세자의 교육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중국 어음(語音)도 몰라서는 안된다”며 “3일에 한 차례씩 서연에서 세자에게 <직해소학(直解小學)>과 <충의직언(忠義直言)>을 가르치도록 하라”고 지시하면서 선생으로 김하를 지정한다. 당시로서는 이미 최고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21년(1439)은 실록에서 김하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이 나오는 해다. 그만큼 활약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미 그 전에도 중국에 가서 조선의 형법이기도 했던 ‘대명률’의 조항과 관련해 중국 조정의 유권해석을 받아 오는 일을 한 것으로 보아 김하는 이 무렵이 되면 중국어와 이문에 상당히 능통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세종31년 9월에는 국방과 관련된 밀명을 받고 북경을 다녀온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고서도 김하의 중용은 계속된다. 그해 말 김하는 중병이 있다며 한성부윤에서 물러나겠다고 청을 올렸지만 문종은 윤허하지 않는다. 단종1년 3월 19일 김하는 사역원을 총괄하는 사역원 도제에 올라 후진양성에 나서게 된다.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하는 그러나 1년4개월 만인 단종3년 윤6월 예조판서로 화려하게 관직에 복귀한다.

그 사이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키고 마침내 1455년 왕위에 올랐다. 김하의 관운은 계속된다. 이미 세종 때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을 알고 있던 세조는 신하들이 김하를 예조판서에 임명한 것을 철회하라고 요청하자 정면으로 물리친다.

세조1년 윤6월 13일 세조는 예조판서 김하와 형조참판 우효강을 주문사로 임명한다. 임무는, 중국에 세조의 즉위를 전하고 허락을 받아 오는 것이다. 그리고 10월 13일 주문사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다. 세조2년 6월 25일 김하는 공조판서로 자리를 바꾼다. 김하는 보기에 따라서는 중국어 실력 하나만으로 부와 권력을 함께 누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또 운도 잘 따라주었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