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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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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준(趙浚·1346~1405)은 개국공신으로서 이성계와도 얽히지만 이방원과 더욱 밀접하다. 그럼에도 학계에서 정도전을 집중 조명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빛을 덜 본 면이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경세가라는 면에서는 조준이 정도전의 몇 갑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조준의 평양 조씨 집안은 요즘 식으로 말해 별 볼일 없었다. 그러나 증조부 조인규가 몽골어에 능해 고려말 출세에 출세를 거듭해 문하시중(조선시대 영의정에 버금)에까지 오르면서 대표적인 명문가의 하나로 자리잡는다.

조준은 무엇보다 행실이 뛰어나고 학덕도 겸비했다. 그는 역사학에 능통했고 경학과 시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고려말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해 호조판서에 해당하는 전법판서를 지냈다. 이 경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훗날 그는 토지개혁을 주창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길을 열기 때문이다.

말년의 우왕이 계속 횡포를 부리자 관직을 버리고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이때만 해도 그는 우왕 축출을 통한 고려 왕실의 재건을 꿈꾸었다. 이 무렵 조준은 이성계와 인연을 맺는다. 1388년 위화도 회군에서 돌아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우왕을 내쫓고 신망이 있는 조준을 불러들여 대사헌을 맡긴 것이다. 조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성계의 거의 모든 구상에 대해 조언하면서 최측근으로 자리잡았다.

그에 따라 조준의 입장은 점차 고려개혁론에서 새국가창건론으로 옮겨간다. 그로 인해 이색 우현보 권근 등과 크게 대립하기도 했다. 또 1392년에는 당시 실세 정몽주로부터 탄핵을 받아 정도전 등과 함께 체포되어 옥에 갇힌다. 마침 그때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고 조준과 정도전 등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고려말 이성계의 최측근으로서 그는 무엇보다 다양한 개혁안을 제시한 싱크탱크였다.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간과 수령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경연과 서연제도의 실시를 주창하여 훗날 조선이 성립되었을 때 국가 근간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후에는 이성계의 최측근이면서도 정도전과는 대립했다. 특히 세자 책봉과 관련해 정도전은 강씨의 아들인 방석을 지원했지만 조준은 초지일관 이방원이 세자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하시중에 올라서는 요동 정벌을 주장하던 정도전의 구상을 꺾고 한편으로는 꾸준히 이방원을 돕고 보호해주었다. 결국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거사에 참여함으로써 최고 실세로 떠오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방원의 부인 민씨의 동생들로부터 무고를 받아 한때 투옥된다. 조준은 외척들의 정치관여를 일관되게 비판했다. 이방원이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외척 경계 등의 내용이 담긴 송나라 진덕수의 <대학연의>라는 책을 건네준 장본인도 바로 조준이다.

정종에 이어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도 능숙한 일처리로 별탈없이 이방원이 새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 이방원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하륜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바로 조준이다.

게다가 그의 아들 조대림이 태종의 사위가 됨으로써 조준과 태종은 사돈지간이기도 했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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