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최근 한 권의 책을 받고 너무나도 기뻤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께서 쓰신 <영의정의 경륜>(지식산업사)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필자는 ‘역사인물 읽기’에서 탁상공론보다는 실무능력을 통해 나라와 백성의 삶에 기여한 인물들을 조명하고 있는데 이 원장의 이책이 바로 그같은 정신과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 원장은 그동안 학자 중심의 연구에서 탈피해 학계에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이준경, 이산해, 오윤겸, 이경석 4명의 조선중기 정승의 경륜을 조명해 왔다.
이산해(李山海·1539~1609)는 실록을 통해 살필 경우 참으로 탁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왜 일부 전문가를 제외하면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할까? 그것은 일관되게 서인과 반대되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 줄곧 권력을 장악했던 서인-노론-벽파가 악의적인 비난만을 퍼부은 결과다.
이산해는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조선 초 대표적인 명문가의 후손이다. 토정 이지함이 그의 삼촌이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이산해는 20대 초인 1561년(명종16년) 문과에 급제해 사가독서를 하는 등 관리로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무엇보다 그가 선조로부터 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선발하는 전권을 가진 이조판서로서 보여준 안목, 즉 사람을 보는 눈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조는 이산해에 대해 “말은 마치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고 몸은 옷을 가누지 못할 것 같으면서 한 덩어리 참다운 기운이 속에 차고 쌓여 있어서 바라만 보아도 항상 공경할 마음이 생긴다”고 극찬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겸손을 서인의 시각에서는 ‘아첨’이라고 비난해 왔다.
그는 서인에 맞선 수장이었다. 정여립의 난이 일어난 기축년(1589년) 그는 좌의정으로 있었는데 정여립과 친분이 있던 동인들이 이때 거의 소탕되다시피 하고 이산해도 자리에서 물러나 교외에서 임금의 명을 기다려야 하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선조는 그를 당장 들어오게 하여 국옥(鞫獄·죄를 신문하여 처벌하는 것)을 맡겼다.
자기 손으로 동인을 죽여야 했으니 참으로 고통의 세월이었다.
그는 동인으로 있다가 북인과 남인으로 갈릴 때 북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북인은 선조 후반 내내 득세했으며 대북과 소북으로 갈릴 때는 대북의 지도자가 되어 광해군이 즉위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그의 49년 관직생활은 그의 사위인 이덕형이 잘 요약하고 있다.
“공은 가정의 교육을 잘 받아 조정에 선 지 49년 동안 일찍이 재주와 지혜를 가지고 있었지만 남에게 앞서려 하지 않아 말은 더듬고 몸 놀리는 것은 더디어 마치 무능한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광해군 즉위년으로 향년 63세였다. 아마도 그가 몇 년만 더 살았어도 광해군은 위정의 지혜를 더하여 반정의 빌미가 된 폭정은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광해군이 내쫓김과 동시에 동인, 북인, 대북 등 이산해가 이끌었던 당파는 크게 매도당했고 이산해 또한 간신의 상징처럼 그려져 왔다. 이성무 원장의 이번 작업은 이산해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그려 내는 초석이 될것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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