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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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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난 10월 초 한 일간지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이 1613년 2월 한 친구에게 보낸 의편지인데 여기에 “(내가) 구봉 송익필의 서손녀와 정혼했다”는 것이었다. 마침 필자는 지난해 초 송익필을 다룬 <조선의 숨은 왕>이라는 책을 낸 바 있기 때문에 이 기사는 흥미를 넘어 약간의 흥분까지 불러일으켰다. 송익필은 조선시대 서인의 수장인데 그의 시집에 동인-북인의 핵심인물인 허균이 시평을 달게 된 이유가 밝혀진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송익필(1534~1599)은 어떤 인물인가? 간단히 말하면 송시열의 스승은 김장생이고 김장생의 스승이 바로 송익필이다. 즉 서인은 이이가 아니라 송익필의 예학에서 출발해 김장생-송시열로 이어졌고 그 핵심은 서인-노론-벽파가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송익필라는 이름이 가려진 이유는 그가 천출(賤出)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신분은 어머니를 따랐다.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의 외할머니가 정승 안당 집안의 종이었다. 그러나 안씨 집안에서는 면천을 시켜 주었고 송사련은 잡직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조광조가 죽던 무렵 조광조를 옹호했던 안당이 조정에서 배제되자 안당의 아들들이 분을 품고 남곤을 비롯한 정승들을 처치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집안 식구처럼 대우를 받던 송사련도 그 자리에 있었고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송사련은 하루아침에 ‘공신’이 되어 안당의 삼청동집과 파주 일대의 모든 재산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송익필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막강한 재력을 가진 집안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송익필은 당연히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서고 싶어했고, 향시에 응시하여 높은 점수로 합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과를 보려 할 때 그의 신분이 문제가 됐다. 결국 그는 꿈을 접고 지금의 출판단지가 있는 파주 구봉산(지금의 심학산) 아래 집을 짓고 일찍부터 제자 양성에 들어간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마침 파주에는 이이와 성혼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친구이자 동지적 관계를 맺고 학문연마와 정치토론을 함께 했다. 마침 후궁의 손자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들은 명종의 왕비였던 대비 심씨의 동생 심의겸과 깊은 교분을 맺었다. 심의겸도 파주에 근거지가 있었다. 당파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선조를 그래도 임금으로 인정했던 무리가 동인, 내심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던 무리가 서인이 됐다. 그리고 이 서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송익필의 관여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문인으로 더 유명한 정철이나 칠백의총의 주인공 조헌은 모두 송익필의 수하에 있었다.

정여립 또한 송익필 쪽에 있다가 반대편 동인의 이발에게 투항했다가 송익필 진영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게 된다. 사실 정여립의 난은 정여립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발을 비롯한 호남 중심의 유학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송익필로서는 장예원 판결을 통해 자신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킨 이발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판결을 주도한 장예원 판사가 정윤희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이 바로 정약용의 먼 조상이다. 왜 정약용이 남인이고 왜 정약용이 세월이 흐른 뒤에도 서인들의 탄압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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