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우리 역사학자들의 인물연구는 너무나도 빈약하다. 주로 사건을 연구할 뿐 그 사건들을 만들어 낸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에는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사건은 연구하면서도 인물은 연구하지 않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건은 비판하기 쉽지만 인물은 비판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나마 이루어진 인물연구들도 빈약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역사적으로 평가가 내려진 인물들에만 한정되고 특히 비판의 대상이 된 인물들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실은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선조들 중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더 많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곤(南袞·1471~1529)도 역사드라마에서 조광조를 해쳤다는 이유 하나로 거의 악인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남곤의 생애를 추적하다 보면 긍정적 의미건 부정적 의미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 주는 대목들이 참으로 많다.
남곤은 고려와 조선에 걸쳐 명문가로 꼽히는 의령 남씨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글을 잘 써 문명(文名)이 자자했다고 한다. 열아홉에 생원·진사 모두 합격한 다음 5년 후인 성종 25년(1494년) 문과에 급제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갑자사화가 나던 연산군 10년(1504년) 평안도로 유배를 가야 했다.
다행히 2년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는 바람에 조정으로 복귀한 그는 황해도·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이때 그를 눈여겨본 인물이 당시의 영의정 정광필이다. 정광필은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 좋은 인재를 많이 발굴한 명정승이다.
이후 다시 승승장구, 중종 14년(1519년) 조정의 최고 실세라 할수 있는 좌의정에 오른다. 그런데 이 해는 기묘년, 즉 기묘사화가 일어나는 해다. 당시에는 조광조가 도의정치를 내세우며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던 때였다. 그런데 중종의 입장에서 보자면 군주제 나라에서 도의정치를 부르짖는다는 것은 왕권의 부정과도 연결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두루 사림들과 가까웠던 남곤은 이때 도의정치와 왕권의 선택에서 후자를 택한다. 실록은 “몰래 신무문으로 들어가 임금의 마음을 경동시켰다. 그리하여 사림들을 거의 다 귀양 보내게 했지만 그 형적이 노출되지 않았으니 그 재주는 따를 수 없다 하겠다”고 남곤의 ‘행적’을 평하고 있다. 조금은 불분명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을 편드는 것은 그 임금이 폭군이 아닌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당시 사림들 사이에서 도의정치를 내세워 신권(臣權)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거셌고 그런 움직임을 차단하는 데 남곤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것은 돌이켜보면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도덕주의에 빠져 조광조는 선, 남곤과 심정은 악으로 평가해 온 것은 온당한 처사로 보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남곤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실록의 사관이 “남곤은 문장이 대단하고 필법 또한 아름다웠다. 평생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돈을 밝히지 않았다”고 기록한 대목은 눈여겨봐야 한다.
그런데 그는 임종할 때 평생을 두고서 써 온 글들을 모두 불사르게 하면서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한 유언을 통해 사림에 대한 정신적 부채감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글들이 전해졌다면 그에 대한 평가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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