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허균(許筠·1569~1618)에게는 늘 ‘풍운의 혁명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아마도 서자의 설움을 다룬 <홍길동전>의 작가이자 기존의 틀을 과감하게 거부했던 삶, 그리고 역모에 연루된 비참한 말로 등이 합쳐져서 그런 수식어를 만들어 낸 듯하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차분하게 살펴보면 조금은 조심해야 할 인물이라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 그의 아버지 허엽은 당쟁이 시작되던 초기에 서인에 맞서 동인을 주도적으로 이끌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최근 발굴된 그의 편지에 따르면 허균은 서인의 창시자이자 노비 출신의 학자인 송익필의 서손녀와 정혼했다고 한다. 반대당의 수장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가 서출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같은 혼인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관리로서 허균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27년(1594년) 문과에 급제했고 3년 후에는 문신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 이때부터 그의 글재주는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황해도 도사(都事)로 나갔는데 이때 한양의 기생을 불러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한다. 그후 다시 복직했지만 소위 요직에는 있지 못하고 한직을 돌다가 1604년 수안군수로 있을 때는 불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다시 파직됐다.
재승박덕(才勝薄德)은 바로 허균을 두고 하는 말이다. 2년 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조선을 찾아오자 그를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대학자이기도 했던 주지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 덕에 삼척부사가 되지만 여기서도 불상을 모셔 놓고 염불을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다시 공주목사가 된 허균은 서자들과 가까이 지냈고 결국 모종의 사건에 연루돼 다시 파직되었다.
정권은 광해군으로 바뀌었다. 광해군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려 할 때 자신과 가까웠던 서자들이 사건의 주모자로 떠오르자 신변보호를 목적으로 당대의 실력자인 이이첨에게 빌붙어 대북파의 선봉장이 된다. 그후 탄탄대로를 달려 의정부 좌참찬에까지 오른 허균은 인목대비 폐모론이 제기될 때 극력 앞장선다. 반면 그와 가까웠던 영의정 기자헌은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마천령 너머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여기서 허균의 운명은 갈린다.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은 자칫 허균과 가까웠던 아버지가 죽을 수 있다고 여겨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린다. 허균이 극비리에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려 했다는 것이었다. 뜻밖이었다. 한동안 기준격과 허균의 상소 공방전이 오가는 가운데 1619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이 나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또한 역모의 내용을 담은 것인데 조사 결과 허균의 외가쪽 서얼이자 그의 심복인 현응민의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결국 허균은 역모의 혐의를 벗지 못하고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고 만다.
공자는 동생 같은 제자 자로에게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을 한 바 있다. 이유는 불혹(不惑)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채 재주와 용맹만을 자랑하는 데 대한 경계의 말이었다. 실제로 자로는 비명횡사를 하게 된다.
허균에게도 똑같은 말을 해 줄 수 있다. 허균은 자제를 모르는 혹(惑)의 상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필자는 그런 점에서 허균에 대해 특별한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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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