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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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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손순효(孫舜孝·1427~1497)는 이름 자체가 유학의 정신을 담고 있다. 공자는 순(舜)임금을 가리켜 큰 효자[大孝]라고 했다.

손순효의 이름은 이처럼 순임금 같은 효자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손순효는 어려서부터 학행이 뛰어나 일찌감치 당시 예조판서이던 정인지의 눈에 들었다. 1453년(단종원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고 주로 학술과 관련된 승문원·예문관·춘추관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아마도 벼슬 초창기였기에 수양대군의 정난 등에는 관여하지 않고 비교적 순탄하게 성종시대에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성종대에 들어 그는 본격적으로 정치 분야에 나아간다. 쉰 살이던 성종8년(1477)에 좌부승지로 승진했고 3년 후에는 형조판서에 이르고 다시 2년 후에는 공조판서로 전임된다. 그러면서도 호학의 군주였던 성종은 손순효의 강의듣기를 즐겨 수시로 불러 학문을 논하였다. 이후 병조판서를 거쳐 성종16년(1485)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된다. 드디어 판서급에서 정승급으로 올라서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사실 성종은 어렸을 때는 정희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그후 친정을 하면서도 어머니 인수대비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조금은 마마보이 같은 임금이기도 했다. 왕비 윤씨가 폐비가 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도 실은 고부갈등이었고, 이 과정에서 성종은 두말 않고 어머니 편에 섰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신하로서 언급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가 정승을 목전에 둔 의정부 좌찬성 겸 세자의 사부로 있던 성종18년(1487) 성종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주연을 베푼 일이 있었다. 손순효는 술이 들어가면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는 성품이었다. 술잔이 여러 차례 돌자 손순효는 갑자기 성종을 향해 “친히 아뢸 일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순간 동료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위태로울 정도의 직언을 해온 터였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손순효가 입을 열었다.

“여알(女謁·임금이 총애하는 여자가 정치에 관여하는 일)이 성하면 언로가 넓어지지 않습니다.”

이에 성종은 몸을 숙이며 “어찌하면 그런 병폐를 없앨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손순효는 이렇게 말한다.

“주상께서 아시기만 한다면 그런 잘못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재상들은 아연 긴장했다. 그러나 성종은 “내 그 간언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며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지나갔다.

하지만 이런 직언은 아무래도 정승에 오르는 데 장애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정승급이기는 하지만 실권은 없는 중추부 판사를 끝으로 손순효의 벼슬살이는 끝을 맺게 된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연산군3년(1497)이다. 사실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연산군으로부터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몰랐다. 이 또한 그의 운이요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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