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후대가 말하는 그의 근무 평가는?

후대가main

 

후대가big여말선초의 역사는 말 그대로 격동 그 자체다. 후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고위관리로 살면서 그 격랑을 무사히 헤쳐나온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처신이나 운수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여말선초 튀지 않는 처신으로 역사에 기여하고 몸도 잘 보존한 인물로 김사형(金士衡·1333~1407)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삼별초를 소탕하고 이어 일본 원정에 앞장섰던 김방경(金方慶·1212~1300)의 후손으로 고려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순조로운 관리의 길을 걸었다. 무엇보다 그는 직무수행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고려 말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수문하시중에 올라 정권을 장악했을 때 강원도 지역을 책임지는 관찰출척사(조선시대의 관찰사)가 되어 해당 지역을 잘 다스렸고 중앙으로 돌아와 대사헌에 올랐다. 그가 대사헌으로 봉직하는 동안 “조정이 숙연해졌다”고 할 정도로 일을 엄격하게 처리해 이성계의 신임은 더욱 커졌다. 자연스럽게 이성계 진영에 속하게 된 김사형은 조선이 개국하자 1등공신에 책록됐고 병조전서(훗날의 병조판서) 등을 거쳐 문하 우시중(훗날의 우의정)에까지 오른다.

그런데 김사형은 우시중으로 있으면서 실력자인 정도전보다는 좌시중 조준의 정치노선을 따랐다. 이것이 훗날 그의 운명을 또 한번 가르게 된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준과 김사형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물론 예전부터 두 사람은 이성계의 사람임과 동시에 이방원의 후원자였다. 당일 두 사람은 이성계를 버리고 이방원을 선택한다. 1398년 8월 26일 밤. 상황이 끝나갈 무렵 주도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조준을 찾았다. 그런데 일관되게 이방원을 지지했던 조준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원이 보낸 사람이 조준의 집에 가보니 조준이 점을 치고 있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점괘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마침내 조준은 결단을 내리고 이성계에 더 가까웠던 김사형을 설득해 함께 이방원 앞으로 나아간다. 좌정승과 우정승이 모두 이방원 편에 섬으로써 왕자의 난은 마침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김사형의 입장에서는 천운(天運)이었다.

조준과 김사형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환상의 콤비였다. 태조 시대 두 사람이 보여준 관계에 대한 실록의 평이다.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없이 국정을 결단하였고 김사형은 관대하고 긴용(緊用)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조정의 논란들이 대부분 가라앉았다.” 조준과 김사형은 업무 차원에서도 상호보완적이었던 것이다.

태종1년 김사형은 마침내 최고 실권자의 자리인 좌정승에 오른다. 그리고 1년 후 마침내 나이 70이 되어 관직에서 물러난다. 태종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 졸기는 “벼슬을 하면서 한 번도 탄핵받은 일이 없다”고 평했다. 유배를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상하 동료들로부터 탄핵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실록이 전하는 그의 성품 때문일 것이다.

“김사형은 침착하고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았고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사람으로 이에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