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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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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교에서 배웠던 인물에 대한 이미지가 실록을 통해 직접 확인하면서 바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조광조(趙光祖·1482~1519)도 필자에게는 그런 인물 중 하나인데 그다지 안 좋은 쪽으로 바뀐 경우라 하겠다.

성종13년에 태어난 조광조는 가장 민감한 때인 10대를 고스란히 연산군 시절에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17세 때 평안도 시골의 찰방(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근처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을 만난 것이 그의 남은 인생을 사실상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은 연이은 사화로 인하여 <소학>을 읽는 것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림들이 대부분 <소학>이라는 책을 통해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의식화’되었는데 김굉필은 별명이 ‘소학동자’일 만큼 <소학>을 중시했다. 그 영향으로 조광조도 <소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이어 연산군의 폭정과 피비린내나는 사화가 이어지자 사림들은 사실상 절대 왕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사림은 점차 신권(臣權) 중심으로 나아가려는 흐름에 동참한 인물들이었다. 사화 또한 왕권중심과 신권중심의 충돌이었다.

<소학>을 통해 철저한 신권중심주의자로 무장한 조광조는 ‘도학(道學)’정치를 표방했다. 조광조가 문과에 급제한 것은 중종10년(1515),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남들에 비하면 조금 늦은 출발이었으나 조정의 주목을 받으며 급성장했다. 다만 원로들은 그의 지나친 급진성을 경계하며 ‘화태(禍胎)’라고 불렀다. 장차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문과급제 불과 3년 만에 홍문관 부제학에 오른 조광조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도학정치의 출발임을 내세워 일종의 도교사원인 소격서 혁파를 주창해 뜻을 관철한다. 철저한 성리학적 질서에 따른 정치를 내세운 것이다. 그래서 실은 이때부터 성리학적 관념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조선사회를 공리공담의 나라로 몰아간 원조가 조광조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게다가 ‘현량과’라는 사실상의 추천방식 인재선발제를 실시해 신진인사들을 뽑고 요소요소에 자기 사람들을 심었다. 그리고 중종 반정으로 공신반열에 오른 인물들 중에 ‘가짜’가 너무 많다며 위훈 삭제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기묘년(1519), 남곤 심정 등은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성하고 있다고 중종에게 고했다. 이미 소격서 혁파 등 자기주장만을 펴는 조광조에 염증을 느끼던 중종은 조광조와 그 일파의 제거를 결심한다. 기묘사화의 시작이다. 그해 말 조광조는 사약을 받았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조광조의 지향점에 대한 동의여부를 떠나 그의 일 추진방식은 너무 급진적이었다. 완급조절을 몰랐던 것이다. 훗날 ‘제2의 조광조’로 불릴 만큼 적극적으로 도학정치를 표방하는 이이조차 조광조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했다.” 그런데 훗날 이이도 이와 비슷한 비판을 받게 된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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