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전복은 맛도 좋고 귀해서 예로부터 ‘조개류의 황제’ 대접을 받아왔다. 게다가 영양분까지 풍부해 ‘바다의 산삼’ 또는 ‘바다의 웅담’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의 연회를 기록한 <진연의궤>나 <진작의궤> 등에는 생복회, 생복초(生鰒炒), 생복증(生鰒蒸), 생복어음적(生鰒於音炙), 생복화양적(生鰒花陽炙), 전복초(全鰒炒), 전복숙(全鰒熟), 숙복초, 전복홍합초(全鰒紅蛤炒), 전복저태초(全鰒猪胎炒), 전복절(全鰒折), 추복탕(槌鰒湯), 인복회(引鰒膾), 전복복지(全鰒卜只), 전복다식(全鰒茶食) 등의 다양한 전복요리가 등장한다.
허균의 <도문대작>에는 큰 전복을 얇게 썰어 만드는 만두가 맛이 좋다고 했고 ‘전복을 따서 꽃 모양으로 썰어서 상을 장식하는’ 화복도 나온다.
중국에서도 전복은 귀한 식재료로 취급되었는데, <한서>에는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뒤 황제에 즉위했던 찬탈자 왕망(王莽)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묘사하면서 그가 “편안한 자리에 앉아 전복만 먹었다”고 했을 정도이다.

전복을 한자어로 복(鰒) 또는 포(鮑)라고 하는데 생복은 살아 있는 전복이고, 전복(全鰒)은 통째로 말린 전복을 뜻하며, 숙복은 삶은 것, 추복은 방망이로 두드려 펴가면서 건조한 것, 인복은 얇고 길게 저며서 말린 것을 의미한다. 말린 것은 또 건복(乾鰒) 또는 명포(明鮑), 회포(灰鮑)라고도 했다.
1803년에 나온 김려의 <우해이어보>는 “살아 있는 것은 생포(生包)라 하고 죽은 것은 전복(全鰒)이라고 한다”고 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전복을 복어(鰒魚)라 하였고 “그 살은 맛이 달아서 날로 먹어도 좋고 익혀 먹어도 좋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말려서 포를 만들어 먹는 것”이라고 했다.
전복은 옛날에도 값어치가 높았던 모양으로 조선시대의 대일(對日) 국교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는 전복 1첩은 쌀 8말과 바꾸고, 생복 1개는 쌀 1되와 바꾼다고 기록돼 있다.
전복이 쓰이는 곳은 궁의 잔치 외에도 많았다. <성종실록>에 여러 차례 나오는 명나라 황제의 요구 물목(物目)에도 전복은 빠지지 않았고, 임금이 신하들에게 내리는 하사품으로도 흔히 애용되었다.
이렇듯 귀한 전복의 수요가 많았던 만큼 그 공급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국조보감>, <홍재전서> 및 <이조실록> 곳곳에는 제주와 양산 등지에서 전복 채취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소문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정조는 그러한 상소에 답하여 “제주는 아득한 바다 밖에 있는 섬이다. 근래에 흉년이 들어 대다수의 백성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생각할 때마다 늘 내가 당한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어공(御供)을 줄일지언정 어찌 우리 백성을 수고하게 할 수 있겠는가. 연례적으로 진공하는 회전복(灰全鰒)을 영구히 감하도록 하라”고 하교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요리서에는 여러 가지 전복요리법이 나오는데 <시의 전서>는 전복숙 요리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좋고 큰 전복을 삶되 처음 삶은 물은 버리고 쇠고기, 해삼, 문어, 홍합 등을 넣어 무르게 고아 건진다. 큰 전복은 저미든지 통째 열십자로 잘라 다시 잘게 자르고 파와 마늘을 다져서 넣는다. 전복숙은 후춧가루, 기름, 깨소금, 꿀을 넣어 삶은 물에 졸여야 좋다.”
서울 방이동의 마시마니에 가면 완도 노화도에서 직송해온 전복으로 만든 회, 찜, 구이 등 다양한 전복요리를 합리적인 가격에 맛볼 수 있다.
글·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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