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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감성여행 <가을날 고창 선운산에 그리움이 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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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서 절로, 절에서 더 깊은 산속으로 향하는 길에는 붉은 꽃이 바람에 나부끼며 우리를 향해 소리 없이 아우성친다. 가냘픈 꽃무릇의 꽃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이며, 마치 자연에 쉼표를 찍어 주는 듯하다. 이런 까닭에 선운사에 가면 절로 마음을 빼앗긴다.

꽃무릇은 꽃이 피었다 지고 난 다음에 잎이 나와 평생 꽃과 잎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꽃이다. 선운사 스님들은 이 꽃을 상사화라고 부른다. 이 꽃에는 속세의 여인을 너무나 사랑했던 한 스님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나서 꽃으로 되살아났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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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산사로 연결되는 오솔길에는 언제나처럼 나지막한 목탁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밤하늘의 폭죽처럼 툭툭 터져 갈래가 진 꽃이 아름답게 피어 눈을 황홀하게 한다. 꽃무릇은 선운사 입구 주차장 개울가에서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다. 처음엔 한 줌씩 흩어져 피다가 매표소 들머리의 송악에서부터는 아예 무더기로 집단을 이루기 시작한다.

특히 부도밭은 온통 꽃무릇 천지다. 푸른 전나무숲 한가운데 자리 잡아 색의 조화가 뛰어나고 고승들의 고고한 기운이 더해져 분위기마저 예사롭지 않다. 이곳부터 선운사 경내까지는 보기에도 시원한 계곡이 흐른다.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석가탄신일 등불이 길잡이를 하듯이, 고운 빛의 꽃이 마치 융단을 깔아 놓은 듯 피어있다. 그 길을 걷노라면 사람도, 꽃도 물속에 선명하게 비치며 한폭의 수채화를 만들어 낸다.

오래된 사찰을 찾아 둘러보는 기분이 첫번째 낙(樂)이라면 꽃 속에 묻혀 가벼운 산보를 하는 것이 두번째 낙이라 할 수 있다. 한번에 두 가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이 여행길은 그래서 더 행복하다.

선운사 대웅전에서 도솔암까지 3.2킬로미터 구간은 붉은 기운이 약해지긴 해도 꽃길을 따라 산행을 할 수 있다. 쉬엄쉬엄 걸어서 간다면 약 2시간이 걸리는 산책 코스다. 산이 떠나갈 듯 울어대는 산새소리는 여행객의 발길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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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길은 말이 산행이지 공원을 걷는 것만큼 쉬운 길이다. 소설가 정찬주는 “이 길을 걷고 있으면 인간세상에서 하늘로 가는 기분”이라 표현했다. 숲길을 약 30분 걸으면 줄기가 우산살처럼 사방으로 뻗친 장사송이란 아주 특별한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수령이 6백년으로 추정되는 이 노거수(老巨樹)는 1988년 천연기념물(354호)로 지정됐다. 마을 주민들이 장사송으로 이름 짓고 나무에 얽힌 전설을 비석에 새겨 놓았다.

이 나무 옆에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이 있다. 깊이가 10미터인 이 자연굴은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 어머니 묘의 배경으로 나와 유명세를 떨친 곳이다.

오솔길 끝에 자리한 도솔암은 기도 효험이 높아 집안의 대소사를 소원하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도솔암을 찾아야 선운사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중이 높은 암자다.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을 의미한다. 깎아지른 기암절벽 사이에 들어선 암자는 보기만 해도 영검이 많은 곳임을 감지할 수 있다.

도솔암 옆 바위계단을 오르면 내원궁이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선운산 골짜기는 이 산책길의 백미라 할 만하다. 바위산이 연출하는 거친 산세와 돌 틈에서 자라난 나무들의 푸른빛이 일품이다. 특히 가을이면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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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 주변에는 등불암 마애불, 용문굴, 낙조대 등의 명소가 있고 등산로는 드라마 <상도>가 촬영된 장소여서 다양한 볼거리를 선물해 주기도 한다. 도솔암은 기도 효과가 높다고 등산객들에게 소문이 나 있다. 집안의 대소사를 소원하는 신자들이 많이 찾는다.

도솔암을 바라보다가 왼쪽으로 시선을 던지면 위압적인 인상의 거대한 마애불이 들어온다. 암자 앞의 거대한 암벽인 칠송대에 새겨진 높이 17미터의 미륵불이다. 마애불 가슴에 눈에 띄는 감실이 있는데 여기에 관한 재미난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검단선사란 스님이 비결록을 써서 넣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이서구가 감실을 열자 갑자기 풍우와 뇌성이 일어 그대로 닫았는데, 책 첫머리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배꼽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다’ 하여 역사적인 사건이 날 때마다 회자되기도 했다.

실제로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의 수장 김개남이 마애불의 비결을 열려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 중기에도 전라부사가 비결을 열려다 벼락에 맞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구문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이를 아는 관광객들은 마애불을 볼 때마다 그 네모난 비결록 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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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 앞을 지나 계속 산길을 오르면 상상 속 동물인 ‘이무기’가 뚫었다는 용문굴이 나온다. 영화 <남부군>에서 배우 안성기씨가 네이팜탄에 맞은 병사들을 돌보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용문굴 일대는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영화촬영 무대로 자주 등장한다.

용문굴과 낙조대 등산길은 험하지 않고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어 쉽게 오를 수 있다. 이왕 낙조대까지 올랐다면 하늘과 바다가 한빛으로 붉게 물드는 낙조를 감상해 보길 권한다. 낙조대에 오르면 굴비의 고장 전남 영광의 앞바다와 젓갈로 유명한 곰소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녁 무렵 서해바다로 사라지며 붉은 빛을 토해 내는 낙조를 본다면 선운산이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다는 온갖 시름을 어루만지듯 온통 붉은 비단 물결로 뒤덮는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변산반도가 한눈에 들어와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을 즐겁게 한다.

선운사에서 고창읍내로 향하는 매산리에는 커다란 돌이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다. 무심코 지나치면 그냥 돌이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이라는 걸 알게된다. 고창군은 눈에 보이는 커다란 돌은 다 고인돌이라고 할 정도로 세계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다. 죽림리, 상갑리 일대를 중심으로 2천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해 있다. 청동기시대의 정신, 사회, 문화, 묘제 등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어느 여행작가는 “쉼표가 없는 일상은 대팻밥이나 톱밥처럼 우리들 본래의 삶에서 시나브로 깎여 나가는 부스러기가 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더위도 한풀 꺾이고 바람도 살랑살랑 부는 9월. 내 삶의 휴식 시간을 아름다운 사람과 멋진 세상에서 소중한 순간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고창 선운사는 최고의 여행지다.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고창읍성도 찾아가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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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모양성’이라 불리는 고창읍성이다. 조선시대 읍성으로 그 형태가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 고창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읍성에서는 매년 음력 9월 9일 성밟기 풍습이 행해진다. 성을 다 밟은 후에는 머리에 인 돌을 성 입구에 쌓아 두는데, 성을 다지고 비상시를 대비하려는 조상들의 지혜가 배어 있다. 글과 사진·유철상 (여행작가)

 

TIP 꽃무릇은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어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잎은 꽃을, 꽃은 잎을 서로 그리워한다는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래서 상사화(相思花)라고도 한다. 상사화 본래의 원종이 있고, 그 방계로서 꽃무릇과 석산화, 개상사화 등이 있다.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두루뭉술하게 상사화 또는 꽃무릇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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