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1

 

추석 즈음엔 하늘은 옥색이고 물은 시리도록 맑아진다. 야무지게 익은 알밤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구르는 새벽 푸서릿길은 찬 이슬로 덮이지만 햇빛이 오래 놔두지 않고 이내 거둬 간다. 잘익은 대춧빛으로 물드는 햇빛은 상품(上品)이다. 멸구와 이화명충을 물리고 태풍을 견뎌 낸 벼들이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감나무며 대추나무들은 가지마다 찢어질 듯 열매를 매단다. 뜰에는 달리아와 국화가 흐드러졌다.

추석은 주춤거리는 기색도 없이 바로 온다. 추석은 온갖 들과 산에서 나는 물산들이 곳간에 그득히 쌓이고 어버이 이녁과 그 핏줄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포를 나누는 날로, 오랜 농경사회가 만들어 낸 맑고 아름다운 마음을 기리는 풍속이고 넉넉한 마음으로 맞는 겨레의 큰 명절이다.

2

고향을 등지고 타관으로 떠났던 사람들도 바리바리 선물들을 안고 귀향길에 오르는 것도 추석이요, 안방 구들을 짊어지고 시난고난하던 노인네가 정결한 옷차림을 하고 척추를 곧추 세우는 날도 추석이다. 그날은 아이나 어른은 물론이고 까치나 강아지도 모두 즐거운 날이다.

본디 곡식과 열매 맺는 걸 다 수확하고 그 가을걷이를 끝낸 뒤, 수확한 첫물들을 챙겨 조상들게 바치는 추석 차례상에 진설할 음식의 재료로 삼았다. 한 해 농사를 잘 짓게 해 줘서 고맙다는 예를 드리는 갸륵한 뜻이다. 어디 그뿐이랴! 추석은 산 자들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 농사일은 얼마나 고단했던가! 선일과 앉은일, 마른일과 진일이 끝없이 이어지는 게 농사일이다. 힘꼴깨나 쓴다는 농사꾼도 밤낮 없는 농사일에 뼈가 휜다. 그 고단함에 보상이 없다면 산다는 일은 팍팍함 일색이겠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창안해 낸 게 추석이다. 산과 들과 바다에서 수확한 것들을 굽고 찌고 기름에 지져 내놓은 풍성한 음식들을 친지들과 더불어 먹으며 스스로 감당한 농업노동의 수고와 고단함에 대해 보상을 하는 것이다. 추석은 참 특별했던 우리의 오래된 삶과 삶에 작용하는 곡진한 마음이 녹아 있는 날이다.

굶어 배곯아 생긴 영양실조보다 과식과 탐식으로 생긴 탈이 속병으로 깊어져 죽는 이들이 생겨나는 요즘, 추석의 본디 뜻은 퇴색했지만 여전히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것만은 분명하다. 올 추석에도 민족 인구 삼천만이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친지들을 만나 가족의 화목함을 안팎에 드러내려고 대이동에 나선다 한다. 모처럼 식구가 한자리에 모인 한가위! 어버이는 늦은 밤까지 불 꺼지지 않은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자식들의 웃음소리에 빙긋이 웃는다.

높이 뜬 한가위의 달은 둥글고, 밤하늘에 나와 노숙하는 별들은 저마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풀벌레 소리는 소슬하다. 타관에 나가 사는 자식들의 몸에 탈이 없는 것만으로도 어버이는 제 인생의 큰 보람으로 여긴다. 그 뿌듯함으로 기쁨은 늘고 사는 것의 버거움은 덜어지는 것이다. 모쪼록 한가위 같아라!

 

글·장석주 시인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