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학자나 사상가로서 이황(李滉·1501~1570)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정작 실천가로서 혹은 관리로서 이황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황은 34세 때인 1534년에야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로 들어섰다. 이이 같은 천재형은 아니었고 어려서부터 학문 자체에 깊은 뜻을 두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벼슬길에 들어선 1534년은 중종이 재위 29년을 맞을 때였으니 연산군의 폭정도 피할 수 있었고 조광조 등 신진유림들이 봉변을 당한 기묘사화(1519년)의 여파도 어느 정도 가라앉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김안로를 비롯한 권신들이 전횡을 시작하던 때라 정국이 하루도 편치 않았다. 게다가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 33세에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부터 교분을 맺은 김인후가 낙향하자 이황도 벼슬에 대한 꿈을 접기 시작한다. 그래서 벼슬살이 10년 만인 중종39년(1543) 성균관 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낙향했다.
그랬기 때문에 명종 즉위 초에 일어난 을사사화로부터 고난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명종 재위기간 내내 조정에서는 이황을 불러 올리려 온갖 방법을 다 썼다. 그의 학식과 덕행에 대한 명성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48세 때인 명종3년 이황은 풍기군수로 임명된다.
1년 정도 군수로 재직한 이황은 또 사직하지만 3년 후인 52세 때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성균관 대사성에 취임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국립대 총장에 오른 것이다.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와 외삼촌 윤원형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지만 이황을 각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명종은 임명하고 이황은 출사하지 않는 일이 10여 차례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이황에게 내려지는 관작은 계속 뛰어올랐다. 56세에 홍문관 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말년에 몇 년 동안 명종은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죽고 윤원형이 정치적으로 패퇴한 때문이었다. 그 사이 이황은 고향인 안동 인근에 도산서당을 짓고 독서와 제자 양성에만 몰두했다. 어쩌면 이황으로서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지 모른다.
명종은 이황에게 판서 겸 대제학에 명하여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명했다. 67세의 이황은 못 이기는 척 한양에 올라오는데 마침 그때 명종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홍문관 등에서 함께 벼슬생활을 한 이준경이 영의정으로서 전권을 쥐고 새로운 임금(선조)을 보필하고 있었다.
이준경이 이황을 불렀다. 그러나 이황은 고심 끝에 낙향을 결심한다. 이때 어린 신왕이 이준경에게 “이황의 학문이 뛰어나다는데 왜 오지 않는가”라고 묻자 “그 사람은 산새에 불과하다”고 혹평한 것은 당시 유명한 일화다.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선조는 다시 이황을 불렀다. 이번에는 의정부 우찬성으로 임명해 경연을 책임져 달라는 명이었다. 68세 때였다.
그러나 이미 연로해진 이황은 새삼 사직을 청하면서 대신 제왕학을 압축적으로 담은 <성학십도>라는 책을 지어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 선조의 허락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황은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따라서 관리로서 이황은 좋은 점수를 받기는 어렵다 하겠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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